-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25
▲ 성소수자를 환영한다는 푯말을 내건 미국의 한 가톨릭교회 ⓒGetty Images |
1.
지난 달 연재칼럼의 주제가 감리교회의 이동환 목사님 출교 판결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며칠 후 교황청에서 동성 커플도 가톨릭 사제에게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참 선명하게 대조가 되네요. 어디서는 축복을 했다고 출교 판결을 내린다는데, 어디서는 사제가 축복을 해 줘도 된다니.
이미 많은 해설 기사가 나왔지만 다시 한 번 복습을 해 보면, 이번 교황청의 발표는 동성 커플이 카톨릭의 혼배성사를 할 수 있다거나 혹은 혼배성사가 아니더라도 결혼식 형태를 띠는 예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고 정당한 지적이지요. 하지만 가족에 준하는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공동생활을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뚜렷한 진전인 것도 사실입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동성 커플을 축복하는 건 교리와 불합치한다” 이랬다니까 더더욱이나 진전인 거죠. 더군다나 가톨릭 내부 인사들의 지적에 따르면, 이 결정은 ‘교황청 교리 선언문’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교리 선언문은 교황이 직접 쓰지 않은 문서 중에서 권위가 꽤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하네요.
이 결정에서는 “축복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동성 커플도 축복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죠.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가톨릭 내부 인사들은 이 결정을 두고 ‘사목적 배려심’, 개신교인들에게 익숙한 어휘로 바꾸면 ‘목회적 배려심’에서 나온 결정이라고들 평가합니다.
2.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점 중 하나는 이 결정이 가톨릭 교회 내에 성소수자 신자가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 굳이 가톨릭 사제를 찾아와서 축복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가톨릭 신자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 결정이 이야기하는 축복에서 배제될 이유는 없을 테지만요.
이 점을 떠올려 보니 새삼스레 생각나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제목을 보신 분들이면 아마 다 짐작이 가실 겁니다. 매 주일 예배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입니다. 아시다시피 저 문구가 들어있는 문장은 끝이 “믿사옵나이다”로 끝나지요.
역시 이 글의 독자분들이라면 대체로 아시는 이야기겠습니다만, 저 문구에서의 “거룩한 교회”란 개별 교회나 개별 교파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조금 더 확장하면 ‘존재했던’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총합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 말에는 반드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으로/영적으로 서로 가지는 관계 속에서 교회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교회라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관계가 물질적으로/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내 옆에’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이 설령 없다고 치더라도, 이 지구상의 어디에든지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이 지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그 ‘바로 내 옆에’라는 말을 하는 ‘나’와도 물질적/영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3.
제가 소속된 기장 교단에도 몇 번 언급했듯이 ‘동성애 동성혼 반대’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다른 나라 교단에서는 성소수자 목회자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두고 우리 교단에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말을 하는 걸 봤습니다. 노회장도 했다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저렇게 ‘우리 교단에선’ 운운하는 게 이 경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앞에서도 보았듯이 원래 교회란, 그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이란, ‘바로 내 옆에’,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내가 소속된 교단에’ 이런 이야기가 전혀 안 통하는 지평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 교단에선’ 운운한다면 대답은 하나밖에 안 나오는 거죠. 그 말 하는 ‘나’는 성소수자 그리스도인과는 ‘서로 교통할’ 생각이 없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인데 누구와는 교통 안 한다 이러고 있다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지요. 이 경우는 저런 말을 한 사람이 노회장까지 지냈다는 사람이었으니 한심함이 조금 더해지구요. 조금 더 나가면 소위 “사랑하니까 반대한다” 이러는 것도 ‘성소수자 그리스도인과는 교통 안 한다’가 될 수밖에 없으니 한심한 건 마찬가지죠.
혹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죠.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이더라도 ‘성소수자’라는 자신의 ‘죄성’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교통 못 할 이유가 없다고요. 그런데 그걸 ‘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떡할 건가요? 아니, 애시당초 ‘죄성’이라는 건 인간 존재에 보편적인 것이라는데, 성소수자만 ‘성소수자’라는 자신의 존재를 또 한 번 ‘죄성’이라는 단어로 바라봐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차별이고 말장난 아닐까요.
그럼 더 나아가서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되어야 할 말인데, 정말 그 말을 믿고 있긴 한 거냐고요. 그 말을 믿고 있는데 ‘누구와는 교통 안 한다’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죠.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