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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기사승인 2023.11.29  01: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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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베드로후서 3:8~13)

베드로후서는 신약성서 문서 가운데 가장 후대의 문서로서, 대략 2세기 초반이 지난 다음에 기록된 문서입니다. 베드로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지만 사도 베드로가 직접 쓴 편지는 아니고,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신앙의 경향들이 나타나면서 의문과 논란이 제기되어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그 골치 아픈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 줄 강력한 권위자는 없는 시절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골치 아픈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논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사도들의 시대가 마감되고 난 이후 초기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른바 ‘재림의 지연’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주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대에 다시 주께서 오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세대에 주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께서 곧 오신다고 했는데, 어째서 여태까지 안 오시는 거냐? 주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는 것은 빈말이 아니냐?’ 이런 의문이 제기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앞선 말씀은 그 상황을 선명하게 전합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는 것과, 또 물로 그 때 세계가 홍수에 잠겨 망하여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3~6).

베드로후서 저자는 옛날에 땅이 물의 심판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환기하면서 장차 하늘과 땅은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는 성서 기록 당시 사람들의 우주와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동시에 인간 역사에 대한 신화적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오늘 현대적 관점에서 그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자연 세계 자체에 대한 규명 내지는 그 법칙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 세계, 인간 삶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회의주의자들을 향하여, 인간의 역사는 격변을 거쳐 왔고, 장차 또 다른 격변이 있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믿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의 교리로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을 믿지 않은 만큼 방종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한다.”는 말이 그 사실을 함축합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니 그저 저마다의 욕망을 따라 그런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저자가 그것을 문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뒷부분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날까지 유지됩니다”(7). 물의 심판에 이은 불의 심판이 그저 자연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의 태도와 관련된 심판의 표상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역사의 변화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희망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낡은 역사의 종말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서 주의 날이 틀림없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과연 언제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신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8).

무슨 뜻일까요? 시간을 나타내는 그리스 말에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란 기계적·양적 시간을 말하는 반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듯이 흘러가는 시간, 곧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하는 식으로 따지는 시간을 말합니다. 카이로스는 그러한 시간과는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기회, 어떤 조건이 성숙하는 때를 말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찬스’ ‘타이밍’을 말합니다. 기계적인 시간으로 몇 년 몇 월 몇 시와는 상관없이 어떤 조건이 딱 들어맞는 때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은 기계적인 시간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오실 것이다.’ 하는 예측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 Flemish School, 「The Last Judgment」 (17th Century) ⓒhttps://catholic-daily-reflections.com/2021/01/27/the-manifestation-of-your-soul-to-all/

그러면 도대체 언제 오신다는 이야기일까요? 본문 말씀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9~10).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회개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내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변화되어 모두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사건이 마치 도둑이 예고 없이 다가오듯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꾸준히 변화하기를 지향한다면,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땅히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태도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11~12).

인간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날은 예측 가능한 어느 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와 더불어 불현듯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은 인간이 지녀야 할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강조합니다. 내 삶과 아무런 상관없이 어떤 예언이 실현되듯 다가오는 주의 날이 아닙니다. 주의 날은 나의 삶의 변화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날을 예비하는 삶을 산다면 이미 구원에 이르렀으며, 그와 무관한 삶을 산다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그 삶의 변화를 동반하는 가운데 ‘새 하늘 새 땅’을 누리게 됩니다. 그 새 하늘 새 땅은 어떤 세계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13).

그 새 하늘 새 땅이 그저 이 땅의 저편 안락함이 보장되어 있는 어떤 곳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 새 땅’이라는 진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후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부터 전해져 온 정의와 평화에 관한 약속의 성취라는 이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이사 32:16~18). 베드로후서의 본문 말씀은 그 옛 예언의 이상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한 마디로 압축하면, 매 순간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는 것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허황된 환상에 대한 부정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일상의 삶의 거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임하는 사건은 ‘대박의 꿈’이 이뤄지듯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 말고 누군가 능력 있는 사람이 내가 바라는 바를 다 이뤄주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은 대로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상은 언제나 더디게 느껴지고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일상의 삶을 진정으로 향유하며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일상의 삶은 어느 순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화되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순간 변화된 우리의 삶의 현실을 말합니다.

본문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아주 인상적입니다. 주의 재림이라는 모티프를 강력하게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떤 환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매우 냉철한 역사적 혜안에 따른 전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간의 의미를 말함으로써 질적으로 조건이 성숙하는 때를 말하고 있는 점, 불의 심판이라는 표상을 사용하고 있지만 심판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인내를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아무도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회개하는 때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 그러므로 매순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점, 또한 그날을 앞당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결단을 강조하고 있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해서 맞이하는 새 하늘 새 땅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상할 때 우리는 곧바로 더 이상 눈물과 고통이 없는 현실을 떠올립니다. 본문 말씀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압축적인 표현으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역설하고 있는 주의 재림에 대한 믿음의 실체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모든 성서의 일관된 초점으로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데 있습니다. 놀라운 초자연적 사건과 더불어 몇 날 몇 시에 일어날 사건으로 순진하게 믿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 약속이 하나의 신화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세계가 그다지 변화되지 않는 가운데 그저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세태는 더욱 험악해지고 있지만, 희망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그 회의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바로 그 회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본문 말씀은, 내가 희망을 바라고 살아가면 세상에 희망이 있지만, 내가 희망을 저버리면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경구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그 깨달음을 동반한 믿음으로 희망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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