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서와 살림의 미래(민수기 21,4-9; 마가복음 2,1-12)
▲ Jan Luykens, 「The Paralytic Lowered through the Roof」 ⓒPhillip Medhurst Collection |
마가복음 본문의 사건은 이해의 실마리가 쉽게 잡히지 않는 편입니다. 사건의 흐름은 분명한데 거기 나오는 말들 때문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그에게 먼저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 이해와 다르지 않은가요? 또 이렇게 말하는 것과 저렇게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쉽냐고 물었을 때 이것은 무슨 말인지요? 얼른 분명해지지 않는 면들이 조금씩 그 안에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버나움에 두 번째 가셨을 때에도 많은 인파가 그의 말을 듣고자 몰려들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치유를 기대하며 오는 이들도 여럿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한 중풍병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혼자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네 사람이 든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리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들은 들것을 지붕으로 올리고 지붕을 뚫고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들것을 달아내렸습니다. 이 과정이 결코 간단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예수께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과정을 언제부터인가는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빛이 쏟아지고 들것이 내려오는 광경은 호기심을 넘어 경이롭게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신 것은 들것을 내리는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친구를 예수께 데려가면 나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그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병자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병자가 누구이길래 그들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애정은 예수 때문에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고, 그 희망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행동을 낳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들것을 내리는 지붕의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으나 병자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동시에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병자에 대한 애정과 치유에 대한 믿음에 예수께서는 감동하셨습니다. 뜻밖의 사건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웅성웅성했겠지만 지금은 예수와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조용해졌을 것입니다. 지붕 위 사람들과 예수의 눈이 마주치고, 예수는 그들의 눈빛 속에서 간절함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의 첫 말씀이 의외입니다. 네 죄가 용서되었다! 병자가 죄 때문에 병자가 되었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말씀은 무리들 가운데 섞여있던 율법학자들의 은밀한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신성모독 아닌가? 네가 뭔데 죄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이들도 병자를 죄인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 때 그러한 반응이 가능할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리 말하는가라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는 소문난 죄인이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친구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풍은 지금도 고치기 어려운데 당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치의 병 중풍은 죄의 결과로 간주되었던 시대입니다. 다시 말해 죄와 병의 인과관계가 의학적인 아닌 종교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병에서 죄인임을 추출해냈습니다. 이같은 사회적 관행에 저항했던 것이 욥입니다. 욥은 어떤 죄가 있어서 재난을 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욥의 재난이 죄의 결과라고 하며, 너는 죄인이라고 가혹하게 몰아붙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맹인을 두고 그가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불행을 동정하고 위로하기보다 죄인으로 낙인찍고 배제시키고 때로는 격리시키기도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반응은 이러한 일반적인 재난 이해에 근거한 것이고 예수도 그 병자가 지은 죄가 아니라 그에게 사회적으로 씌워진 죄의 굴레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네 죄가 용서되었다!
그러자 수군대는 율법학자들에게 예수께서 질문을 던집니다.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쉽냐 어렵나는 것은 그 말이 현실이 되느냐 안 되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후자를 말하고 그 말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예외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죄만 놓고 말하면 가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단지 언어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 실현을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말하기는 이것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죄용서는 상대가 자신에게 지은 죄라면 용서의 권한이 자신에게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용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외에 죄를 용서할 자가 누가 있는가라고 말했다면 그 말은, 좁게 이해했을 때, 그의 죄가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풍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징계받을 만한 죄가 그에게 있다는 것이 저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이 어떤 죄의 결과도 아니고 징계를 받아 생긴 것도 아니라면, 그런데도 그릇된 통념에 따라 병자를 죄인으로 간주한다면,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병자와 관련해서 그 믿음은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그들은 이 병자가 정말 그 병에 상응하는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를 예수께 데려올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욥의 친구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가 그의 병을 보고 죄인이라 손가락질해도 그에 대한 애정을 감출 수 없었고 그를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그에게서 이미 죄의 굴레를 벗겨주었습니다. 그들이 그를 예수께 데려온 것은 그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는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고 그런 의미에서 “용서하고” 새 삶의 가능성을 그에게 찾아주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인정이고, 그 행위의 의미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예수의 이 말씀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죄 용서의 선언은 그 통념이 근거없음을 말하고 그 배후의 종교적 세력을 거부하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이해를 독점한 세력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입니다. 무슨 권한으로 그가 이렇게 하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율법학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말에 맞는 현실을 만들어내심으로 그 말이 참임을 보여주시려고 하십니다. 하여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걷어서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의 말씀대로 그는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가 죄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고, 이로써 예수에게 그럴 권한이 있음이 확증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용서와 회복이 그의 죄를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와 또 그 병자를 다시 사회적 통념의 포로로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병자를 그가 지은 죄, 중풍의 심판을 초래한 죄에서 해방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를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비난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사회와 그 관습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는 몸의 회복과 동시에 사회적 굴레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들의 지배체제가 위협당하게 된 세력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처할 위험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 한 사람을 살리심으로 그가 속한 사회를 죄의 굴례로부터 해방시키시려 했습니다.
민수기의 사건은 이와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 아래 광야를 지나는 동안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은 위기 앞에서 아무 힘도 갖지 못했습니다. 위기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더이상 참지 않으시고 불뱀으로 그들을 응징하십니다. 중풍병자의 경우와 달리 그들에게 죄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죽음도 그 결과임이 사실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들을 살려달라 기도하고, 하나님은 치유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청동뱀을 만들어 세우고 뱀에 물린 자들이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치유의 청동뱀이 높이 세워지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두 사건은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은 각각의 경우에 용서와 치유의 길을 열어주시고 살림의 미래로 인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청동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청동뱀을 보듯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봅니다. 그에게서 치유가 시작되고 용서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사회적 억압의 굴레이든 우리 자신의 잘못이든 믿음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 믿음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특히 약자에게 연대하는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주님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결과 원망과 불평의 이스라엘은 치유와 회복으로 가나안을 향해 계속 갈 수 있었고 중풍병자와 동료들은 자유의 새시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중보기도에 응담하심으로 새시대를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위로와 치유를 얻고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우리의 오늘이 어둡고 힘들더라도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우리를 안아주시며 우리와 함께 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내일을 향해 새힘으로 달려가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