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나리온에서 보이는 것(마가복음서 12:13-17)
▲ 돈 속에서 재물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Wikipedia |
1.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교활합니다.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사사건건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 딴지를 겁니다. 말장난 같은 논쟁을 걸어서 예수님에게서 어떤 꼬투리를 잡아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도 바리새인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단 듣기 좋은 말로 접근합니다. ‘당신은 진실한 분이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기 가르칩니다. 참 훌륭합니다.’ 그리고는 물어보는 척 본론을 꺼냅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됩니까? 바치지 않아야 됩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입니다. 로마가 온 세상을 점령해서 다스리던 시절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어느 것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로마의 비위도 맞춰야 하니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황제에게 바쳐라’ 하면 이스라엘을 배신하고 침략자에게 굴복하는 꼴이 됩니다. 더구나 황제는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고 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한 가장 큰 율법도 범하는 셈입니다. ‘세금을 바치지 말아라’ 하면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당국에 의해 범법자로 잡혀가게 됩니다.
우리 민족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 36년을 살면서 신사참배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뼈아픈 분단을 경험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도 빠졌습니다. 6.25 전쟁 중에는 낮에는 국군이 몰려와서 ‘빨갱이 아니냐’며 총을 겨누고, 밤에는 인민군이 내려와서 ‘반동분자 아니냐’고 총을 겨눕니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이런 아픈 역사가 다 지나간 듯하지만, 실은 아직도 우리는 그 세월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철학이 있습니다. 사상이 있습니다. 주의가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철학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 거슬러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던지는 물음은 참 진리를 추구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단순한 함정입니다.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입니다. 나와 너, 이편과 저편, 아군과 적군. 둘로 명확하게 나누어져 버린 세상에서 어느 편을 선택하겠냐는 물음입니다.
이런 물음에는 무엇이라고 대답하든 반드시 적대자가 생기게 됩니다. 이편을 선택하면 저편과 싸워야 합니다. 아군을 선택하면 적군이 총칼을 겨눕니다.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선이냐?’ 하는 것은 이미 의미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내가 속한 것이 진리고 내 편이 좋은 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2.
온 세계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도대체 왜 저렇게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왜 아직도 저러고 있습니까? 전쟁만 그렇습니까? 정치는 어떻습니까? 진리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까? 오직 나에게 유리한 것, 나에게 불리한 것만 있지 않습니까?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었지만 대통령이 거부할 것이라고 합니다. 통과시킨 이들이나 막겠다는 이들이나, 정책의 옳고 그름을 놓고 그 가치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편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는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에 경제의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그저 많이 벌면 그게 최고 아닙니까? ‘뭘 해서 어떻게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느냐’가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 아닙니까?
며칠 전에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설문인가 했더니 ‘장래에 나는 직업을 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충격적이게도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선택한 것이 ‘내가 힘들게 일한 만큼의 보상을 제대로 받는 직업을 택하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다음으로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이 ‘내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택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선택지 중에 혹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정의롭게 만들고, 사람들을 살려주고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게 하는 그런 일을 하겠다’는 그런 선택지는 없더냐? 했더니 그런 건 없었답니다. ‘얼마나 보상받는가, 얼마나 재미있는가? 얼마나 버는가? 얼마나 그럴듯한가?’ 하는 선택지였다고 합니다.
아이의 기억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학교에서조차 장래의 직업을 가르치면서 얼마나 가치 있고 얼마나 보람 있고 얼마나 의미 있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버는가, 얼마나 재미난가 하는 것이 중요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만 그렇습니까?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도, ‘내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 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떳떳하고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슴 벅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 사는가? 얼마나 풍요로운가? 얼마나 즐거운가?’ 그런 관심으로, 그런 목적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오늘 물음 자체를 바꾸어 버립니다. 고민의 차원을 바꿔버립니다.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 이편에 서느냐 저편에 서느냐? 그게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놓고서는 갈등하고 충돌하고 분열하고 분쟁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문젭니다. 그렇게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 불이익이 되는가? 그런 관심과 목적으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합시다. 당신들은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품에 품어내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 되는 그런 세상을 상상이나 해 봤습니까? 니 편 내 편이 아니라, 모두가 한편인 그런 세상을 상상이나 해 봤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은 그런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내가 얼마나 득을 보게 될까? 나에게 어떤 즐거움이 올까?’ 그런 고민이 아니라, ‘올바르고 참된 것이 무언가? 진짜 의미 있는 삶이 무언가?’ 그런 고민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고민으로 기도를 채워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 나누었지요? 고난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의미가 달라지만,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구요. 똑같습니다. 눈앞의 문제가 전부인 것처럼 지지고 볶는 사람들에게,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산다고 항변하는 우리들에게, 더 깊은 근본적인 차원, 더 높은 거룩한 차원의 문제를 고민하자고, 예수님은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품고 사는 고민이 달라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3.
오늘 주보 표지 사진을 보셨습니까?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입니다. 전태일의 삶에 대한 짧은 글도 주보 뒷면에 실었습니다. 제가 정리해서 적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구요. 두산백과사전의 ‘전태일분신항거’ 항목을 요약했습니다.
지난 2020년 11월에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맞아서, 전태일 열사의 영상도 상영하고 그 생애를 함께 나누었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오늘도 주보에 ‘전태일열사기념주일’이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총회에서는 그렇게 정한 바 없습니다. 우리교회에서만이라도 기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제가 제 마음대로 적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영웅적인 분신 사건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삶의 고민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내가 얼마나 득을 보게 될까? 나에게 어떤 즐거움이 올까?’ 그런 고민이 아니었어요. ‘무엇이 올바르고 참된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의미있는 삶인가?’ 그런 기도를 했어요. 기도만 하고 고민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고민대로 그 기도대로 살려고 노력했어요. 예수님의 초청에 그대로 응한 겁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동전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황제의 얼굴이 보이느냐? 황제의 글씨가 보이느냐? 그럼, 그거 황제 거네. 황제 거니까 황제 줘라.” 예수님의 말씀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교묘한 함정을 피해나가는 잔재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거꾸로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데나리온 동전에서 황제의 얼굴만 보입니까? 하나님 얼굴은 안 보입니까? 황제의 글씨만 보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까? 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왜 하나님 말씀을 읽지 못합니까? 데나리온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 앞에서 내 거냐 니 거냐 싸우는, 그런 것만 보이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역사는 왜 보지 못합니까?”
이 말씀뿐입니까?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면 좋겠다. 내가 행하는 기적을 보고, 내가 말하는 비유를 듣고, 내가 살아내는 나의 온 삶을 보면서, 너희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냈으면 좋겠다.
십자가 보면서 ‘주여, 주여’만 하지 말고, 십자가의 삶 속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사랑합니다’ 입으로만 노래하지 말고, 제발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성경책 들고 예배드리러 왔다 갔다 하지만 말고, 진짜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겼으면 좋겠다.”
우리는 데나리온을 보며 살아갑니다. 동전 한 닢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데나리온은 사악한 물질주의 맘모니즘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자리 잡고 있는 터전입니다. 우리가 그 터전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터전에서 무엇을 보느냐? 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속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포기할 수 없는 내 것이 보입니까? 부럽기만 한 남의 것이 보입니까? 두려운 황제가 보이고, 거역할 수 없는 세상 이치가 보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었습니다.
내 마음이 요동칩니까? 저건 좋다. 저건 싫다. 이건 맘에 든다. 이건 밉다. 옳지, 요렇게 되면 좋겠다. 아니야. 그렇게 되면 안 돼… 아직도 내 마음과 내 호불호와 내 편 니 편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더 가야 합니다.
‘황제의 편이냐 율법의 편이냐? 나에게 이득이 되냐 불이익이 되냐?’ 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희망의 말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왜 주님이 우리 편이 안 돼 주시지? 왜 내 사정을 도와주지 않지? 왜 내 소원을 안 들어주지?’ 그렇게 불평하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는 영 남의 나라입니다.
더 큰 물음, 근본적인 물음, 그 물음을 붙들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그 뜻을 사모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그런 응답 백날 받아 봐야 헛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기뻐하는 내가 되어야 해요. 그렇게 살아가는 내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그게 진짜 기도의 응답입니다.
4.
교회의 시간은 감사절을 지나 이제 성탄절을 향해 달려갑니다. 12월 첫 주에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산타 할아버지 선물만 기다리는 그런 어린 아이같은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에이, 그저 내 마음가는 대로나 살아보자.’ 모든 희망 놓아버린 세상 속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십니다. 그리고 보여주십니다. 진짜 의미 있는 삶이 이런 것이라고, 이렇게 살면 내 삶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바로 그런 예수의 삶을 내 삶 속에 모시는 마음으로 우리는 성탄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오시고, 예수님의 삶이 내 삶이 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데나리온을 앞에 놓고, 황제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냐? 묻는 세상 앞에서, ‘어리석은 자들아, 문제 자체가 잘못됐다. 나는 예수의 삶을 살겠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