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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만명 중에 하나

기사승인 2023.09.24  2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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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른후트에서 온 편지 (17)

▲ 북위 38도선 ⓒNARA

숲속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른 도시에 사시는 목사님이 손님 몇분과 지나가시다가 인사를 하셨다. 얼마 전에 뵈었는데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손님들에게 참 인상에 남는 내 소개를 해주시기를…

“자. 여기 우리나라 오천만 인구 중 한국 사람으론 단 한명 뿐인 모라비안 교회의 회원을 소개합니다.”

이 교회 회원이 될 때, 정말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되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서, 어서 회원이 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교회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들은 한국 사람을 방문객으로 만난 경험은 있지만, 여기 사는 교우로서는 처음이었다. 우선 시간을 보내며, 꾸준히 교회에 나가면서 교제했다. 약 2년 여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목사님이 혹시 회원이 되겠냐고 물어보셨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나서, 교육에 참가하였다.

마침내 연말 주일에 입회원식을 했다. 우리 가정은 맨 앞줄에 앉았다. 예배가 마무리될 무렵, 입회식이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마치 결혼식 주인공처럼, 교우들 앞에서 서약했고, 그들의 축복을 받았다. 한국에서 나를 아껴주시던 목사님이 오셔서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할 수 있었다.

나의 회원식을 보고, 한 독일 자매가 자기도 회원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후에 이야기할 정도로 뭔가 특별했다. 아무것도 아닌 이방인을 이렇게 교회의 한 회원으로 맞아주신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라비안 형제 교회 회원으로서의 자부심은 늘 충만하지 못했다. 그저 누구나처럼, 그렇게 한 일원이 되어 갔던 것이다. 결혼식에서 가졌던 그 마음 그대로, 늘 축제적인 삶을 사는 부부가 어디 있겠는가!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감사하고 새롭고, 감격하는 그런 생활은 아닌 것이다. 서로 간에 실망도 하게 되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매너리즘 같은 것이 서서히 자리 잡으려고 할 때, 숲길에서 마주친 목사님의 내 소개말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래, 내가 지금 경험하는 것은 300년 전 진젠도르프도 겪어보지 못한 한국 사람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회원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건 정말로 오천만 한국 사람 중에 처음이지 않은가.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역사의 한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더욱 소중하고 귀한 경험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양,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되새겨 본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이런 특별한 면을 누구에게나 주지 않으셨을까… 지구 전체에 사는 사람들 지문이 다 다르듯이 어떤 사람이건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하게, 유일하게 여기시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오천 만명 중 하나로 이 교회의 회원이 된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어쩌면, 내 살아온 삶이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여정이었고, 그 여정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하시는 애틋한 눈길이 있었다는 것이 유일무이한 일이 아닌가. 누구라도 그렇다는 생각에 이르자, 귀하지 않은 삶이 없고, 다 유일하게 하나님께는 사랑스러운 자식인 것이다.

그리고 북한 사람, 한 명이 떠오른다. 내가 이 마을에 왔을 때, 위층에 사는 어머니에게 들락거리는 따님이 북한 김치를 먹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동독 시절에는 내가 오기 훨씬 전에 북한의 누군가가 이곳, 구동독 땅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때는 동·서독이 합쳐지자마자였을 것이다. 서독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동구권의 나라들이 공산화에서 벗어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북한은 더 이상 사람들을 동구권에 둘 수 없었다. 빠르게 소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작은 가방만 들고 모두 집합시켜 소환했다. 그때 한 사람이 애지중지하던 기타를 한 독일 사람에게 맡기고 가면서, 내가 다시 와서 찾을 때까지 잘 보관해달라 했다고 한다. 그분은 그 북한 사람과 아주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라 하면서, 아쉬움과 그리움이 가득찬 눈으로 내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 기타를 만질 때마다, 잊히지 않는 북한 친구가 생각난다며. 나도 가슴이 아려왔다.

정말이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사람이 자기 기타를 찾으러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얼마 전에 탈북민 중의 한 분이 이곳을 자유롭게 다녀갔다. 그분은 두 번째 오셨는데, 오실 때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래서 밥이라도 한 끼 최선을 다해 차려드렸다. 아버지는 전쟁 때, 남하하셔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내 뿌리는 북한인 것이다.

모두가 자기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묻어있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닐까… 나만이 가진 그 비밀이 오천만 명 중 하나이고,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내가 되는 것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자기만의 길을 간다.

홍명희 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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