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왕조를 뒤흔든 밧세바 겁탈은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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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gene Siberdt, 「The Prophet Nathan rebukes King David」 ⓒMayfair Gallery, London/Wikipedia |
‘밧세바 겁탈 은폐사건’과 ‘해병대수사 외압·은폐사건’의 닮은 꼴
이스라엘의 왕들의 치적과 죄악을 낱낱이 남겨놓은 사무엘서(하) 내용 중에서, 특히 11-12장에 다윗왕조를 밑바탕에서 붕괴시킨 ‘다윗의 밧세바 겁탈 은폐사건’이 적라라 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사회의 민심의 동향에 은근히 큰 영향을 끼칠 ‘해병대수사 외압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지급부터 3,000년전 다윗 왕과 그 주위 충성파들의 행태와 오늘 우리사회 최고 통치자와 그 주위사람들의 행태 사이에 유형적 닮은꼴이 보인다.
“한손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읽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것이 보인다. 이스라엘 전체역사에서 다윗을 능가할만한 위대한 정치인, 군사전략가, 예술가를 찾아볼 수 없다. 다윗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비겁하고 연약한 죄인으로서 인간”이었다. 다윗의 위대성이 얼마나 컸으면, 매우 비판적 역사서술 자세를 지닌 이스라엘 왕조시대 신명기 학파나 예언자 전통에서도, 훗날 메시아는 다윗가문에서 날 것이라고 수백번 다짐 하였겠는가?
큰 눈으로 보면, 다윗의 치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시대’가 변하고 중앙집권적 ‘왕조시대’를 열고 강화하려는 정치적 비전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통일하기 위해서, 수도를 그 중간지점 예루살렘으로 정해서 천도 하였고, ‘실로’라는 시골촌읍에 모셔져 있던 야훼종교 제사장전통 귄위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정치권위과 종교권위를 통합시켰다.
국가 영토확장 면에서 북쪽으로는 페니키아와 아람 시리아로부터 남쪽은 사해 동서부 아말렉, 암몬, 모압, 에돔지역까지 다 삼켜버렸다. 다윗 왕의 왕권이 야훼 하나님의 선택과 인준으로 말미암아 영원하리라는 ‘왕정계약신학’이 정립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을 우리는 읽고 있는 것이다.
왜 ‘밧세바 겁탈’ 사건이 고대 절대왕권시대에 문제가 되었던가?
한국의 고도 부여의 ‘낙화암’에만 가보아도 “3천 궁녀 간곳 어데냐?” 노래가사가 있고, 진시황을 비롯한 폭군들과 고대왕권 충성파들은 절대군주 왕이 죽어 장례를 치룰 때, 섬기던 살아있는 궁녀들까지 함께 매장시키는 ‘순장’(殉葬)이라는 잔혹하고도 비인간적 제도가 있던 고대의 절대 왕권시대였다.
그러나, 성경이 다윗의 ‘밧세바 겁탈과 그 은폐사건’을 크게 다루는 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 사건이 십계명을 어기는 유부녀 겁탈사건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더 큰 문제인데, 절대권력자가 절대권력을 행사하여 자신이 범한 죄악을 은폐하고, 완전범죄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 맹목적 충성파 부하장군 요압과 이심전심 통하고 밀령을 내려, 밧세바의 남편이요 충직한 우리아를 격렬한 전투장에 보내서 죽여버렸다는 사건 때문이다.
‘밧세바 겁탈 은폐사건’과 ‘해병대수사외압 은폐사건’이 닮은 꼴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 산앙공동체에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여 범하지 말라”는 십계명 정신은 인간양심을 권력으로서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실과 사실을 힘으로 은폐하려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밧세바의 정조지킴을 요즘말로 하면 사회정의 지킴이요 공정성 지킴이기 때문이다.
둘째, 윤 정권이 가장 많이 강조하는 자유, 공정성, 불법에 대한 법에 의한 처벌 강조는, 빈부귀천이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예외를 두면 안 되는 것이요 차별하는 예외특권 남용은 권력우상화가 된다는 민중의 비판정신이다. 셋째, 다윗의 절대권력이 부패하듯이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특히 요압 장군처럼 절대권력의 과오를 육탄으로써 엄폐하거나 은폐하려는 아첨꾼 정치모리배들이 민주주의 대통령이 아니라 제왕적 절대 권력자 주위엔 들끓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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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
다윗의 진정한 위대성은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용기에 있다
다윗의 진정한 위대상과 메시야가 그의 후손에서 날 것이라는 예언전통은 다윗이 지녔던 인간적 위대성 곧 정치가, 군사전략가, 시인과 예술가, 주위 사람을 포용하는 포용성이나 인간용병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 앞에 나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삼하12:7)라고 지적할 때, “이런 늙은 요망한 자칭 예언자를 당장 끌어내어 능지처참 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을 터인데, 무명의 시골예언자 나단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의 눈물기도를 드렸다(시 51).
‘해병대수사외압’의 맨위 최고 권력자가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노라고 끝까지 항변하는 전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을 “항명죄와 상관 명예훼손죄를 물어서” 군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강제구인까지 했다. 군사법원은 “증거인멸우려나 도주우려가 없다”고 상식에 준하는 판단 아래 국방부 검찰단의 구속영장 신정은 기각되었지만 보직이 박탈당하고 해임된 박대령은 계속 군법정에 서게 되었다.
박정훈 대령은 요압장군 군대 초급장교 우리아의 신세로 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군대 특히 정의와 충성 외에는 모르는 해병대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국방부나 해병대가 알아서 잘 처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젠 다 늙어서 조용하게 자기자신의 문제나 반성하고 자기성찰에 전념해야할 필자가, 이 문제를 기독교신문 칼럼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정치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다윗왕조를 붕괴시킬만한 심각한 도적적, 영적, 사회윤리적 국가기강 확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헌법상 대통령은 대한민국 군대의 최고 책임자이다. 평생을 군대에 복무한 한 사람 해병대 대령의 호소를 대통령은 진지하게 듣고 해명하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
특히 대통령실 참모들과 여당 지휘부 정치인들이 제발 요압 장군이 범한 다윗 죄과의 은폐기도 유혹에 빠져사는 안 된다. ‘선택적 침묵’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다윗 같은 솔직한 고백과 참회를 국민과 하늘이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또 하나의 ‘우리아’의 억울한 희생과 죽음을 못본척 외면한다면 그 죄과를 하나님은 한국인 모두에게 특히 성경말씀과 하나님을 날마다 들먹이는 기독교인들에게 묻지 않으실까 두려운 생각이 든다.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soombat194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