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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배할 것이냐, 따를 것이냐

기사승인 2023.05.31  01: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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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사람의 삶을 살았다(누가복음 2:1-7, 39-40; 23:44-46)

▲ 예수 혁명가 ⓒhttps://raiot.in/jesus-the-revolutionary/

2장 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 39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에 규정된 모든 일을 마친 뒤에, 갈릴리의 자기네 고향 동네 나사렛에 돌아왔다. 40 아기는 자라나면서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였다.

24장 44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인간의 생애

2009년 『생애의 발견』(인물과사상사)을 처음 펴낸 저자 김찬호는 “삶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과 생리적인 연명을 넘어 의미를 빚어내는 것이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저서 『생애의 발견』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인이 불행한 까닭은 그러한 “삶의 부재” 때문이며, 시간에 쫓기고 거대한 체제에 의해 관리되는 생활 속에서, 그리고 불가해한 탐욕과 두려움에 끌려 다니면서 우리가 모든 ‘순간’에서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경험을 이야기로 빚어내고 그 의미가 타인에게 공명될 때, 인생은 살맛이 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는 생존을 넘어 살맛나는 삶 자체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생애는 어떤 모습인가요?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생애는 어떤 삶인가요?

예수의 생애

오늘 읽은 성서의 본문을 통해 보는 예수님의 삶은 우리들의 삶과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그리고 일하고 살다가 어느 날 때가 되어서 숨을 거두는 보통 사람의 생애와 똑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의 생애는 우리와 뭔가에 있어서 다를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그는 생존을 넘어 참 사람의 삶 자체를 살아갔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고 따라서 그는 비록 2000년 이전의 사람이었을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의 생애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먼저, 기독교가 기억하고 있는 예수의 생애에 관하여 살펴보아야겠습니다. 특히 교회 역사, 다시 말하면 교리 역사는 예수의 생애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원후 4세기의 니케아 신조는 예수를 참 하나님, 참 사람 임(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을 강조하면서 그의 태어남-고난-부활-승천-재림이라는 주제로 예수의 생애를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도신경도 대동소이합니다. 예수의 생애를 “태어남(‘성령 잉태와 동정녀 마리아 탄생’ 강조)-고난-죽음-부활-승천-재림”의 구조를 중심으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천국으로 이끄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 콘스탄티노플 신조, 칼세돈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한국 장로교 신조, 성공회 39개 신조, 통합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가톨릭 요리문답, 정교회 요리문답, 루터교 일치신조, 침례교 신앙고백, 기감 신앙고백, 하나님의 성회 신앙고백, 등 거의 모든 교파의 신앙고백과 신조가 예수의 생애를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천국으로 이끄는” ‘구원자’라는 틀 속에서 <태어남-고난-죽음-부활-승천-재림>이라는 비슷한 구조로 예수의 생애를 설명합니다.

4영리(靈理) 신앙

현대 기독교인에게 가장 알려지고 영향을 끼친 문서가 있습니다. 4영리(靈理)라는 문서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2.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3.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도 예수의 생애는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신조와 신앙고백에서 나타난 구조로서 설명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생애를 <태어남-고난-죽음-부활-승천-재림>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생애로 발견하고 파악하는 여러 신조에서 비롯된 4영리 구조와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서구의 희생양 논리, 그리고 아시아의 공적사상과 기복사상이 더해지고 문자주의적 근본주의가 합해져서 매우 기형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출발점, 예수의 생애

이처럼 오늘 한국 교회의 기형적인 신앙의 근원은 이 같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편협하고 일방적인 해석과 설명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해석은 결국 예수의 생애를 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신적인 존재, 아니 예수가 신 자체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가 행한 모든 이적 행위들은 예수의 신적 존재 증명입니다. 병자 치료, 다양한 장애인을 고쳐 주는 사건, 물 위를 건거나 풍랑을 잠잠하게 한 모든 이적 사건은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에 대한 신성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는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인간을 벗어나서 완전한 신의 세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예수는 더 이상 따라야 할 존재가 아니라 오직 숭배와 경배의 신앙의 대상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이 땅위에서의 행적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신조들은 예수의 생애를 위에서 언급한 <태어남-고난-죽음-죽음-부활-승천-재림> 으로 규정하고 예수의 이 땅위에서의 생애와 행적들을 다 생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신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숭배와 경배, 다시 말하면 믿음의 대상이지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에 관한 지식은 모두 그가 누구인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다. 예수는 원죄가 없으시다. 예수는 구원자이다. 예수는 우리의 죄 값을 치루고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등의 교리와 관련된 지식들입니다.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오늘 우리의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생애의 목적이 오직 인류의 구원이라는 것으로 집중됨으로써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신학과 교회의 가르침은 예수 생애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모습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전환되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 전환되지 않고서 신앙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의 전환은 예수의 생애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발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유대인 예수

예수의 생애를 발견하는 첫 단계는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는 유대 가문에서 태어나 유대문화와 전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대 율법과 유대교의 진통 및 제사 문화에 대하여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을 비롯한 많은 예수 세미나에 속해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가 철저한 유대사람이었으면 유대종교 하에서 교육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가 받았다고 하는 교육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교육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문자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 사람들과는 달리 전통과 구전에 의한 지혜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예수는 정통 율법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문맹자이었듯이 예수의 부모도 그랬을 것이고 따라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문자 교육을 받았을 리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 자체도 글을 읽을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공식 교육을 통한 것이 아닌 태생적인 의미를 말하고자 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는 유대의 역사와 사회적 환경 경제 그리고 종교적 상황 속에서 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가르침, 그의 생애, 그의 이적, 치유행위, 축귀행위 그리고 십자가의에서의 죽음 그리고 예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 즉 부활, 승천과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유대 문화와 종교 그리고 전통을 제외하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가 유대인으로서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 생애의 발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그리고 그것을 오늘의 우리 신앙에 적용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예수의 생애가 유대사회와 문화 그리고 유대 종교의 배경에서 이야기가 되고 그리고 그것이 의미를 가지게 될 때 예수의 삶은 온전한 삶의 이야기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가 유대인으로 그의 삶을 살았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되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생애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덜어진 사람이 아니라 유대사람으로 유대사회에서 유대인과 함께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유대인으로 사셨다는 발견은 우리의 신학과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과연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은 우리로 한국인으로 살아가게 만들고 있는가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한국인의 전통과 한국인의 종교문화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가 유대인으로 산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과연 철저하게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를 돌아봐야 합니다.

오늘 한반도에서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종교 속에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전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역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한국문화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외래종교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한국역사와 문화의 미래와는 전혀 상관없는 폐쇄된 집단으로 소멸되어 갈 것입니다.

예수를 유대인으로 살았다는 것은  그가 유대 역사 변혁의 시기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로마제국의 폭거에 저항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로마제국과 그리고 그것과 결탁한 불의한 종교권력을 향하여 저항하는 과정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여 지키고 있는 수난절의 이름을 저항절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게 등장하고 있고 실지로 그렇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유대인으로 살았던 예수를 오늘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따른다는 것은 한국 역사의 굴곡에서 저항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신앙인들이 한국 역사의 한 복판에서 불의와 저항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한국인 신앙인으로서 오늘의 역사에 적극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역사를 외면하고 고고하게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바라보는 것은 유대인으로 사신 예수의 삶을 모욕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유대인으로의 생애 발견은 우리로 한국역사 속의 ‘예수 따르미’로 살아가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 교회는 한국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민족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 아니 온 우주를 향하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변혁의 길을 가르친 선생

복음서 기록자를 비롯하여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기억하며 사용한 단어 중에 “선생님”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선생님’으로 기억했습니다.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적대시하던 사람들도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지혜의 선생으로 사셨습니다. 예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분명히 선생으로서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으로서 예수는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통하여 바른 믿음을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유대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높은 수준의 윤리 혹은 도덕을 가르쳤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른 믿음의 선생 혹은 도덕 선생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행위는 이단 식별과 도덕가의 삶을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 대다수 신자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들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죄, 이단 혹은 거짓으로 정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에수생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예수는 어떤 종류의 선생님이셨을까요? 이에 대하여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그의 저서 <예수 새로 보기: 영, 문화 그리고 제자 됨>(Jesus, A New Vision: Spirit, Culture and the Life of Discipleship)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는 바른 믿음이나 건전한 도덕을 가르친 선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길, 특히 변혁의 길"을 가르친 선생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1세기 유대인들의 일상적 현실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인습적인 지혜에 대한 철저한 비판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길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인습적인 지혜에 대한 비판자로서 자기 시대의 문화와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새로운 길과 방향을 가리켰던 선생이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길, 삶의 길, 삶의 방향에 대해 가르친 분이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두 길 사이에서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리석은 길/슬기로운 길, 죽음의 길/생명의 길, 넓은 길/좁은 길, 예속의 길/해방의 길, 눈 감음의 길/눈 뜸의 길,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 “성인의 길” 앞에 서 있습니다.

인류의 선생들은 큰 업적을 남긴 사람보다는 두 길 앞에서 우리에게 좋은 길,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길의 방향에 관하여 가르친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도 두 길에 대해 말했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그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세요. 망하는 데로 이끌어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은 널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비좁은지요. 그래서 그것을 찾는 사람은 몇몇뿐입니다.”(마태7:13-14)

예수는 무엇보다도 좁은 길로 갈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좁은 길은 무엇보다도 당시 사회의 인습적인 지혜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누구나 걷고 따르는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가르쳤던 길은 다름 아닌 변혁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습적 지혜에 저항하며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 변혁의 길을 걸어갔던 예수의 생애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스스로 걸었고 가르쳤던 그 변혁의 길, 좁은 길, 저항의 길을 걸을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길을 가르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물질우상의 문화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소비문화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요? 업적과 결과의 양에 따라 가치판단이 좌우되는 오늘의 사회에서 정의, 평화, 생명 그리고 사랑의 가치 중심적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 보다 어떤 방향의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지도자는 많은 업적을 이룩하거나 경제대국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그런 지도자가 아니라 사회가 나갈 방향을 보여주는 선생과 같은 지도자일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선생으로 사신 예수 생애를 발견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믿는 이들이, ‘예수 따르미’들이 그리고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를 향하여 방향을 보여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예수, 가난한 사람을 위한 혁명가

예수는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다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빈민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위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건축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인력 시장에 나가서 일용노동자로 불려가기를 기다리는 경험도 했습니다. 농번기에 농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습니다. 고기 배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 착취의현장도 경험했습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다양한 노동의 비유는 이러한 자신의 삶의 경험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를 발견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예수가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난과 노동을 예수의 생애에서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그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노동자 예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의 사역의 방향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가’라는 시각의 문제는 모든 일의 향방을 결정합니다. 위로부터 바로 보는 것과 아래로부터 바라보는 것은 커다란 차이를 낳습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삶의 행위와 결과는 달라집니다. 예수는 그의 시각의 출발점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편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민 편에 서 있었습니다. 가난한 밑바닥 기층민의 시각에서부터 출발하여 행동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로 예수의 생애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과 ‘예수 따르미’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를 결정짓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적 행위는 자명해 집니다. 우리는 오늘 사회의 가장 낮은 자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가장 소외박고 억압받는 계층으로부터 출발해야 우리의 신앙이 전환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의 편에서, 노동자의 편에서, 성소수자를 비롯한 다양하게 소외되는 사람들로부터, 여성으로부터, 어린이로부터, 노약자로부터, 난민과 이주민으로부터, 다문화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처럼 편파적이었습니다. 그는 무사공평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는 사회의 불의한 구조를 향하여 저항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한 외침의 행동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는 행위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는 대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사회적 뒤집기(혁명)를 시도하다 높은 곳의 권력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습니다. 그는 본보기로 희생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불의한 권력에 의해 자행된 희생의 죽음입니다.

오늘 이런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소외된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부단한 훈련과 끊임없는 의식성찰(깨어있음)이 필요합니다. 일부러라도 그리고 의식적으로 소외된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순서를 기획할 때도 어떤 행사를 구상할 때도, 어떤 회의를 구성할 때도 이런 원리를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 따르미’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생애의 발견은 우리로 신앙의 내용은 물론 방향을 전환하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꿈꾸는 사람 예수, 영의 사람(사랑, 평화 정의, 생명의 꿈)

예수의 생애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는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됩니다. 그가 태어 날 때 천사들이 영으로 함께 합니다. 예수의 부모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예수와 함께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가 세례 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그의 위에 내립니다.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사탄의 시험을 받지만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으로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는 평생 동안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였고 강도의 굴혈로 변한 성전을 정화시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이적을 베풀고 정의를 외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면서 그의 영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성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는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갔기에 예수는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안에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혀서 평생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을 꾸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는 진정 꿈꾸는 사람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가 꾸는 꿈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 평화 정의, 생명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평생 하나님의 영과 동행하면서 하나님나라를 향한 여정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나라 꿈을 꾸는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이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예수와 함께 예수와 같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사람들에 “왜 예수를 믿고 따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믿고 죽어 천국에 가기 위함”이라고 답변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예수 생애를 제대로 발견한 사람에게 위의 답변은 적당한 답변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다면 우리의 꿈의 내용은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꿈이 될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해쳤던 그의 형제들과 만나고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세기 45:5-8)

요셉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았기에 하나님의 원대한 역사 섭리에 대하여 알수 있었고 그리고 그 길을 따랐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요셉의 생애가 서로 맞물리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 영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의 생애처럼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내용과 행위는 전환 될 것입니다.

예수 생애의 발견

예수는 “단순한 생존, 물리적인 시간과 생리적인 연명을 넘어 의미를 빚어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탐욕과 두려움”에 끌려 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이야기로 빚어내고 그 의미가 타인에게 공명되는 살맛나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유대사람으로서 동족 민중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삶을 살았고 이해한 예수, 인습적 지혜에 저항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고자 했던 예수,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혁명을 꿈꾸던 예수평생 하나님의 영과 동행하면서 하나님나라를 향한 영의 사람, 예수.

참 사람으로 사신 예수 생애의 발견은 오늘 우리로 예수를 따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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