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주일(5월28일)
1. 신앙의 시대에서 믿음의 시대로 전락하였으나 성령의 시대를 사모하며!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모든 교회력은 성령강림절기로 한해가 끝이 납니다. 삼위일체교회력과 CCL(최병학 목사의 기독론 중심교회력)은 성령강림절기 이후, 9월 첫 주 창조절을 시작으로 새로운 한 해 교회력이 시작되고 RCL(공동성서일과)의 경우, 12월경 대림절부터 한해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교회력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 순환합니다. 이것은 성경도, 또한 우리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구약을 성부의 시대, 신약을 성자의 시대로 보면, 성령강림 이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 하비 콕스와 『종교의 미래』 |
이렇게 성령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21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하비 콕스는 교회의 세속화와 교회의 자본주의화를 경고하며 『종교의 미래』(문예출판사, 2010)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예수 시대로부터 기원후 300년에 이르는 ‘신앙의 시대’(The Age of Faith), 4세기 초경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긴 기간인 ‘믿음의 시대’(The Age of Belief), 20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는 아주 짧은 기간인 ‘성령의 시대’(The Age of the Spirit)로 나눌 수 있다.” |
여기서 시대를 구분할 때, 초대 교회의 ‘신앙(Faith)의 시대’와 중세 및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믿음(Belief)의 시대’는 ‘신앙’과 ‘믿음’이라는 같지만 다른 말을 사용하였는데, 역자인 김창락 교수는 이 두 단어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교를 받아 드리는 어떤 사람의 자세를 표현하는 용어로 영어에는 ‘faith’와 ‘belief’가 있고, 우리말에는 ‘신앙’과 ‘믿음’이 있다. 사전적 정의로 우선 단순하게 구별하면 ‘belief’는 어떤 명제나 사안이 참되다는 확신(confidence)을 뜻하고, ‘faith’는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대상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태도, 즉 신뢰/신임(trust, reliance)을 뜻한다.” |
곧, 신앙(Faith)이란 신앙의 대상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투신하여 삶의 방향을 결단하는 신뢰를 뜻하는 것이며, ‘믿음(Belief)’은 단지 교리나 신조 따위를 참이라고 승인하는 머릿속의 지적 작용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로마 국교로 공인되기 전 초대 교회는 ‘신앙의 시대’로, 예수를 따라가는 삶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다양한 평등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 시대로 여기에는 전체 공동체를 하나의 틀 속에 얽어매는 ‘하나의 교회’라는 제도도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며 성직자계급도 없고 개별 신앙을 통제하는 유일한 교리의 구속도 없이 박해 가운데서도 자유의 기운과 협동 정신과 삶의 생기가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시대’는 4세기 그리스도교회가 로마제국의 권력에 기대어 하나의 교회라는 제도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의(교리)를 제정하는데, 이것은 교권과 다른 이들을 처리하는 잣대, 곧 이단을 처단하는 척도로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는 예수에게 삶 전체를 투신하는 신앙은 사라지고, 그 대신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치열한 교리투쟁과 잔인한 이단 처단이 이어지는가 하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계급 갈등이 극점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본래적 생명력을 되찾으려는 개혁자들은 모두 이단자로 처형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비 콕스 교수에 의하면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도 교계의 일각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바람이었습니다. ‘내재적인 것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이요, ‘세속적인 것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영적인 것의 재발견’인 성령의 바람이 금세기에 휘몰아쳤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의 부흥을 통해 그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자 역설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생긴 교회가 조직화함으로 성령의 바람이 사라지고 교리투쟁과 이단 처단의 시대가 되었으나 지금 다시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바람’은 ‘자유로운 영성의 시대’를 갈망하는 하비 콕스의 바램입니다. 신조(信條)를 중심으로 조직된 ‘경직된 종교’와 성직자 중심의 ‘권위주의적 체계’에 반대하는 하비 콕스는 우리 시대의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비롯해 모든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체계에 반대하는 신학자입니다. 만약 하비 콕스가 오늘날 거대하게 조직화 된 한국 교회를 보았을 때, 성령의 바람은 멈췄을까요? 아니면 계속 불고 있을까요? 나아가 자유로운 영성의 시대가 꽃을 피울까요? 아니면 이미 지고 땅에 떨어져 뭉개졌을까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의 자유로운 바람이 불기 위해서는 하비 콕스의 말대로 내재적인 것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또한 세속적인 것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영적인 것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내재적인 것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입니다. 구약 말씀은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 규례로 부정한 음식 가운데 정한 음식을 구별함으로 내재적인 것 속에 신성함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몸을 더럽히는 질병을 고치심으로 신성하고 깨끗한 것을 찾게 해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말씀은 방언, 곧 언어를 통하여 내재적인 것 속에 신성한 것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바로 소통입니다. 이렇게 성령강림주일에 정하고 깨끗하여져서 서로 소통함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성령의 바람, 내재적인 것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 정하고 부정한 것
내재적인 것 속의 신성한 것의 재발견은 첫째 음식에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은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례입니다. 구약 시대에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과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과 철저히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 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레 1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가치관과 구별되는 하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먹는 음식을 구별함으로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이자 성령의 강림 증거입니다. 사실 먹는 것이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영어에도 “You are what you eat(당신이 먹은 음식이 곧 당신이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 영국에서는 닭 95%가 공장식 집약사육 농장에서 사육되고 있으며 영국에서만 매일 3백만 마리의 닭이 소비되고 있다. |
물론 오늘 성경에 먹을 수 있는 동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의 식문화는 너무 육식 위주입니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육식이 환경에 나쁜 7가지 이유’라는 글에서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공장식 축산이 기후변화에서부터 산불, 인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환경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분석합니다. 따라서 육류 및 유제품 섭취량을 급격히 줄이지 않는다면 기후 위기는 막을 수 없게 되고 인류의 생존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장식 축산이 지구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경고합니다. 그리피스 서울사무소가 제시한 일곱 가지를 살펴볼까요?
첫째, 공장식 축산이 지구에 해로운 이유는 산림 벌채와 산불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공장식 축산은 전 세계 산림 벌채의 가장 주된 원인으로 손꼽힙니다.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아마존 열대우림 화재도 브라질 농장주들이 소를 키울 공간을 확보하고 대두와 같은 동물 사료를 재배하기 위해 숲에 불을 질러 개간하는 화전개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둘째, 기후 위기의 원인이 됩니다. 축산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 세계 자동차, 트럭, 비행기 등을 포함한 교통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과 맞먹습니다. 육류 소비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를 키우기 위한 땅을 개간하기 위해 숲이 파괴되면 대기에는 수십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방출되며 기후변화를 가속합니다. 베어진 나무는 그대로 방치되어 썩거나 불태워지면서 그 과정에서 또다시 온실가스를 배출합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지구의 기온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건강한 숲과 나무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린다면 기후 위기는 더욱 악화할 것입니다.
셋째, 아마존 열대우림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내몰고 있습니다. 아마존 열대우림은 생존에 필요한 비를 스스로 생산하여 숲 전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유지합니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 등을 위한 산림 벌채가 현재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아마존 열대우림은 곧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내몰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존에 거주하거나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뿐만 아니라, 숲 전체가 파괴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산림이 파괴되면 강수량도 현저히 줄어 남미 지역의 사람들이 먹을 식수와 생활용수가 감소하고, 가축을 기르거나 곡식을 재배하는데 필요한 물이 줄어들며, 전 세계 기후 형태가 변하고 말 것입니다.
넷째, 인권 침해와 토지 강탈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브라질의 제라이제이라(geraizeria)와 같은 토착 원주민 공동체는 아마존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최전방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린피스 브라질 사무소의 조사에 따르면, 브라질의 콩 생산업체가 토착 원주민 공동체 제이라제이라 원주민들을 괴롭히고 억류, 납치, 심지어는 총살하는 일도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과 정부는 불법 벌목업자나 채광업자, 농장주들이 원주민들의 토지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는커녕 기존의 규제를 축소했을 뿐만 아니라, 토지 횡령을 합법화하며 암묵적으로 장려하고 있습니다. 토지 강탈은 폭력 사태로 번지는 경우가 많아 원주민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거대 육류가공회사 JBS가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불법 운영하는 육류 공급업체와도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섯째, 야생동물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공장식 축산업은 산림 벌채와 서식지 파괴, 가축 사료 생산을 위한 유독 살충제 살포 등을 통해 수천 종의 야생동물을 멸종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 중 상당수는 아직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종입니다. 건강한 환경은 인류의 생존에도 필수적입니다. 건강하고 풍부한 생물 다양성은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과 깨끗한 물, 의약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공장식 축산업으로 인한 생물 다양성의 빠른 감소는 기후 위기를 악화시켜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입니다.
여섯째,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 발생 가능성을 높입니다. 축산업을 위한 산림 및 야생 지역의 파괴는 새로운 전염병 출현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새롭게 나타난 전염병의 75%가 동물로부터 유래된 질병입니다. 산림 벌채와 화재는 야생동물과 인간 사이의 접촉을 확대하고, 동물에서 인간으로 치명적 바이러스 전파가 가능한 환경을 만듭니다. 더 많은 산림이 파괴될수록 새로운 전염병 출현의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공장식 축산은 작은 공간에 면역체계가 약한 수많은 가축을 밀집시켜 사육하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훨씬 빨리 확산해 인간으로 전달될 가능성이 큽니다.
일곱째, 공장식 축산은 근본적으로 비효율적인 생산 방식입니다. 공장식 축산이 효율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토지 면적 중 1/4 이상이 가축 사료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데, 애초에 이 땅은 사람들이 먹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땅입니다. 1kg의 닭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3.2kg의 사료가 필요합니다. 이를 효율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만약 모든 사람이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꾼다면 지금 사용되는 땅의 75%는 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중국, 유럽, 호주를 모두 합친 면적과 맞먹습니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에게 먹일 사료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땅보다, 사람들이 직접 먹는 식량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땅의 면적이 훨씬 적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만약 식물 위주의 식사를 한다면, 숲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충분한 칼로리와 영양소를 담은 건강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새로운 식습관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들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을 재발견하고 우리의 탐욕을 줄일 때 성령의 바람은 지구에 평화와 생명의 하모니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3. 성령의 바람, 내재적인 것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 깨끗함을 받으라!
내재적인 것 속의 신성한 것의 재발견 둘째는 몸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고치시는 사역 가운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 |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 1:40-42)
나병은 몸을 힘들게 합니다. 당시에는 전염성이 있다고 하여 공동체로부터 격리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몸의 구별입니다. 그러나 이후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경고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 1:43-45)
모세가 명한 것을 드린다는 말은 깨끗하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의 그 입증은 모세를 넘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입니다. 단지 병이 나은 것에 머물지 않고, 곧 몸이 깨끗하여 구별된 것에 머물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바람입니다. 바람은 부는 것이지, 그냥 멈춰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성령의 바람, 내재적인 것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 언어
내재적인 것 속의 신성한 것의 재발견은 셋째 언어에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방언 기도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 사도들의 머리 위에 임한 성령의 불 모자이크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마침 예루살렘을 방문한 경건한 유대인들인 오순절 순례객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습니다. 그런데 순례객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인데, 각기 자신들이 살던 곳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 2:5-8)
순례객들이 온 곳은 지중해 전역입니다. 따라서 언어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제자들로부터 하나님의 큰일을 자기 나라의 언어로 듣게 됩니다. 이것이 내재적인 것 속에 있는 신성한 것의 재발견입니다. 비록 언어가 달라도 성령께서 들을 수 있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 곧 소통의 영을 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행 2:9-12)
그렇습니다. 소통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소통의 영이요, 언어를 통해 신성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식을 구별하고, 몸을 구별하여 우리 안에 있는 것 속에서 신성한 것을 재발견하여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언어가 달라도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정하고 깨끗하여져서 성령의 생명과 자유의 영 안에서 서로 소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