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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행하는 가족 공동체로!(전 11:1-8 고후 2:5-11 막 3:31-35)

기사승인 2023.02.03  00: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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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다섯째 주일/해외선교주일(2월5일)

1. 토사구팽과 호모 코로나쿠스

▲ 토사구팽

신묘년 토끼 이야기 다섯 번째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사자성어입니다. 이 말은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라는 뜻입니다. 사냥할 때 토끼를 다 잡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가 필요 없게 되어, 그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말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쉬운 표현으로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각자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쓸모없어지면 버리는 매정한 사람이나 사회를 뜻합니다. 공동체성이나 연대의 가능성이 사라진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는 함께하는 공동체성이 무너지고 파편화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더 가속되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람들 서로 간에 정과 사랑도 거리두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이들이 ‘호모 코로나쿠스’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로, 공동체성이 희박한 세대, 연대의 개념이 새롭게 변화된 세대로,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 교수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공동체성이라는 수백만 년 동안 이어진 인류의 지혜가 코로나19로 최근 2~3년 동안 차단되면서 사회의 파편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이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후 유전자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변화이다. 사람은 인생에서 교훈을 경험하면 안 잊기 때문에 (코로나19는) 인류 행동 패턴을 결정하는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코로나 시대에 등장한 신인류인 호모 코로나쿠스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관계에 구속되지 않으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비대면과 온라인에 익숙하고 철저히 개인화, 파편화되었습니다. 따라서 호모 코로나쿠스 세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학교에 꼭 가야 하나?”,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삶도 멋지다”, “남의 인식은 신경 쓰지 않는다.”

▲ 호모 코로나쿠스의 습성

놀라운 것은 이들의 가족에 대한 인식도 변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모 코로나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을 만나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가족과 부족을 살아가다 발견하기도 한다. 유일한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요? 혈연적 가족을 넘어, 살아가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 만나면 그게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새로운 가치로 연결되는 온라인 공동체가 바로 호모 코로나쿠스 세대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터넷이 젠더, 섹슈얼리티, 취미, 관심사 등 여러 면에서 자신과 공명하는 커뮤니티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호모 코로나쿠스는 온·오프라인의 경계 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집단을 적극적으로 찾아 교류합니다. 가족은 더는 핏줄로 이어진 사람들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이들이 강력한 정서적 유대감으로 결속해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나가는 것입니다.

본래 가족을 뜻하던 ‘팸’ ‘크루’ 같은 용어들은 이제 호모 코로나쿠스 사이에서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친한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아마도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듯합니다. 주로 지향하는 가치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집하는데, 어느 팸에 속할 것인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과도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이들은 여러 집단에 동시에 소속되기도 하고, 집단과 집단 사이를 유연하게 이동하기도 하며 새로운 집단을 직접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앞서 말씀드린 토사구팽이 있습니다. 이들은 공동체성과 연대성이 약합니다. 끈끈한 결속력이 없어 쉽게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함께 공유할 ‘영적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이익에 따라 모였기 때문에, 한 번 틀어지면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호모 코로나쿠스는 새로운 가족의 대안을 보여주었지만, 내용 없는 형식으로 약간 아쉬움이 남습니다.

2. 예수님의 가족: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가족이니라!

따라서 오늘 말씀은 진정한 가족 공동체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가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혈연적인 가족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호모 코로나쿠스의 가족 개념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라는 영적 가치를 전제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입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는 호모 코로나쿠스의 가족 개념과 달리, 함께 공유하는 영적 가치가 있어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용서’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교인들을 근심하게 한 이를 용서하고 품으라고 합니다.

지난주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교회 내에서 악한 이는 내쫓으라고 했는데(고전 5:13), 오늘 말씀은 반대죠? 같은 바울의 말이지만 첫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와 두 번째 편지(고린도후서)의 내용이 이렇게 다릅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 공동체가 아무리 지혜로워도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 전도서의 말씀이 그 내용을 들여줍니다. 다가올 모든 일이 헛되니, 일희일비하지 말고 단지 오늘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막 3:31-32).”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 와서 찾는다고 전해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3-35).”

그렇습니다. 가족은 이제 더는 혈연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요, 한 형제자매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함께 공유해야 할 영적 가치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영적 가치를 공유한 사람들은 토사구팽이 아니라, 배려와 용서, 인내와 사랑으로 함께하는 것에 가치의 우선성을 둡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수합니다.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근심하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말씀을 볼까요?

3.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기보다는 사실은 여러분 모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아프게 한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들릴까 보아서 나는 어느 정도라는 말을 씁니다. 그 사람은 이미 여러분 대다수의 사람에게서 상당한 벌을 받았으니, 이제는 여러분도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지나친 슬픔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디 그에게 사랑을 다시 베풀어주십시오.”(고후 2:5-8)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많았다고 말씀드렸죠?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 모든 교인을 근심하게 한(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치리, 곧 벌도 받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내가 그 편지를 쓴 것은 여러분이 그 시련을 얼마나 잘 견디어내는지 또 내 교훈을 얼마나 잘 순종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용서하면 나도 그를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이든 용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앞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용서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책략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고후 2:9-11)

여기서 ‘그 편지’는 뭘까요? 첫 번째 편지, 곧 고린도전서입니다(정확히는 ‘눈물로 쓴 편지’로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쓴 편지입니다만). 이 편지에서 바울은 교회 내에서 악한 이는 내쫓으라고 했죠? 매우 신랄하고 준엄한 내용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랑이 담긴 눈물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특히 교인들은 자신의 변화된 태도를 바울에게 증명해 보이고자 불의를 행한 이들을 처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불의한 자를 그렇게 징계하였으니 이제는 용서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잘 보살펴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불의한 자를 완전히 추방하고자 했지만, 바울은 그것이야말로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 곧 사탄의 책략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징계는 불의한 자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다시 온전한 성도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사실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벌주겠느냐는 것도 있습니다. 오십보백보입니다. 결국 이렇게 심판하고 벌주면 그게 끝이 아니라, 원수가 되고 보복이 끊임없어지기에 그러한 사탄의 간계에 빠지지 말고, 그 계책을 깨닫고 용서를 통해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씀을 볼까요? 중간 부분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4.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니,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5-6)

▲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로워도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도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선행에 투자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앞부분 말씀을 볼까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전 11:1-4)

여기서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라는 말씀은 조금 이상하죠? 떡(빵)을 물에 던지면 젖고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무모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뜻은 이웃을 향한 선행은 반드시 보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랍의 고대 격언에 보면, “선을 행하라. 네 빵을 물에 던지라. 그러면 언젠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등장하는 랍비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랍비 아키바(Akiva)입니다. 최초의 『탈무드』의 편집인인데, 그가 어느 날 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난파된 배 한 척을 보았습니다. 아키바는 난파선에 있던 한 제자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키바가 갑바도기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제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키바는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어떻게 바다에서 용케 살아나왔는가?” 그 제자가 답합니다. “랍비여,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셔서 파도들이 나를 쳐올려서 해변까지 떠밀려오게 되었습니다.” 랍비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떤 좋은 일을 하였는가?” 제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배에 올랐을 때, 한 가난한 사람이 저에게로 와서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나 좀 도와주시오.’ 그래서 제가 그에게 빵 한 덩이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저에게 ‘당신이 당신의 빵으로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당신의 삶도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캄캄한 날들이 있을지니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늘 다가올 모든 일이 ‘헛됨’을 생각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b).”

▲ 동해의 밝은 빛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늘 선을 행하고(선행에 투자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행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곧 대가를 바라지 말고, 때로는 캄캄한 날이 있다고 생각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족 공동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오늘은 해외선교주일입니다. 지구촌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기에 토사구팽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때로는 징계하고, 때로는 용서하며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도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즐겁다고 합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전 11:7-8a).”

오늘도 눈으로 동해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 주신 아름다운 빛 가운데 동행하고 사는 여러 해 동안 즐겁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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