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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살신성인처럼,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라!(삿 4:4-10, 21-24 고전 5:9-13 막 3:13-19)

기사승인 2023.01.27  01: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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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넷째 주일(1월29일)

1.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토끼 한 마리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 달토끼

윤극영의 동요 ‘반달’의 가사입니다. 동요 반달과 여기 나오는 하얀 쪽배와 토끼 한 마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달을 보고 토끼 한 마리가 나무 아래서 떡방아를 찧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요 ‘반달’은 말을 갓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또 아이들끼리 흥얼거리는 우리나라의 대표 동요 중 하나입니다(아마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죠?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릴 듯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토끼는 우리에게 친근합니다.

또한 토끼 관련 속담도 많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친다’, ‘놀란 토끼 눈’, ‘토끼 같은 자식’ 등. 속담, 언어 표현에 이르기까지 토끼는 우리 문화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농경민족이 지닌 특성을 토끼가 지녔기 때문입니다. 토끼를 뜻하는 한자어 ‘묘(卯)’자는 음력으로 2월, 시간으로는 오전 5시부터 7시 사이를 가리키는데, 음력 2월은 농사가 시작되는 달이고, 묘시는 농부들이 논밭으로 나가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묘’ 자에는 만물의 성장·번창·풍요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토끼 이야기, 네 번째로 설화와 경전에 등장하는 토끼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불교 경전에 나오는 토끼 이야기입니다. 토끼가 자신을 보시(普施,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베풀다)해 배고픈 자를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예로부터 토끼는 예로부터 선한 동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 같은 모습은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전인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어떤 범지(梵志, 인도 특유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의 네 신분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승려 계급을 말합니다. 브라만이라고도 합니다.)가 산중에서 수천 년을 지내면서 날마다 네 마리 짐승들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여우와 원숭이, 수달, 토끼는 날마다 도인인 범지에게서 경전과 계율의 법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산에 먹을 것이 떨어져 범지가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자, 네 마리 짐승은 “우리가 각기 나가서 도인을 위하여 공양할 것을 구해 오자.”라고 약속하고 도인이 떠나지 말기를 마음으로 원하였습니다. 원숭이는 맛있는 과실을 가져와 도인에게 바쳤고, 여우는 밥과 미숫가루를 구해 와서 도인에게 바쳤습니다. 수달은 물에 들어가 큰 고기를 잡아 와서 도인에게 바쳤습니다.

바칠 것이 없었던 토끼는 ‘나는 무엇으로 저 도인을 공양할까?’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내 몸으로 공양하자.’ 그리고는 마른 풀을 주워 와 불을 붙이며 도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이 불에 들어가 구워지면 하루 양식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토끼는 불 속에 몸을 던졌습니다. 도인은 토끼의 그 인의(仁義)에 감동하고 또 그들을 가엾이 여겨 떠나지 않고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달에 자신을 위해 온 몸을 바친 토끼의 모습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그때의 그 범지는 저 제화갈라 부처님이요, 토끼는 내 몸이며, 원숭이는 저 사리불이요, 여우는 저 아난이며, 수달은 저 목건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화갈라 부처님은 과거를 주관하는 부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현세를 주관하는 부처이고, 미륵불은 미래를 주관하는 부처입니다. 또한 사리불과 아난, 목건련은 석가모니의 십 대 제자들입니다.

▲ 해남 미황사 부도에 조각된 방아 찧는 토끼

이렇게 온 몸을 던진 토끼의 보시행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곱씹어 볼 만합니다. 우리네 삶은 집착으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苦)이 생깁니다. 그 집착은 대부분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집착하고 탐하는 모든 마음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피안(彼岸)으로, 곧 깨달음으로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그 방편이 바로 보시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렇게 신묘년, 보살 토끼를, 아니 십자가 토끼를 가슴속 깊이 새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게 하심이러라!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시행, 곧 사랑의 실천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며 파송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더러운 귀신을 내쫓고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한 마음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꼭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방해 세력, 곧 예수님 제자 안에도 있었던 가룟 유다과 같은 교회 안에 있는 사탄을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니, 상관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방해가 되는 교회 안에 있는 자와는 사귀지도, 또한 함께 먹지도 말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구약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협력해서 선을 이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외부의 적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야엘이 협력하여 이스라엘의 대적자인 가나안 땅의 야빈 왕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물리칩니다. 이렇게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3-15)

▲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예수

예수께서 세우신 이들은 이스라엘 12지파처럼 12명입니다. 숫자 12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창 49:28, 출 28:21, 수 4:9, 마 10:1, 계 21:12, 14 등). 따라서 12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가리키는 숫자 ‘3(유대인들은 하늘이 삼층, 곧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중-해, 달, 별이 있는 창고-하나님이 계신 가장 높은 하늘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과 땅을 가리키는 숫자 ‘4’(땅의 동서남북)를 곱하면 ‘12’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열심당)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 3:16-19)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나중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 바울 사도의 권면이 생각납니다.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발생한 근친상간과 같은 패륜적 사건의 실상을 공개하고 질책합니다.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 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한 말은 만일 어떤 사람이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음행을 일삼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남을 중상하거나 술 취하거나 약탈하거나 한다면 그런 자와는 상종하지도 말고 음식을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고전 5:9-11)

지금 중요한 것은 이교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불교 이야기를 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지금 불교나 이스람교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심판할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있는 그 악한 자를 쫓아내십시오.”(고전 5:12-13)

오늘 한국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먼저 교회 안에서 하나가 똥묻은 사람을 제대로 회개시키고 그리고 온 교회가 되어 협력해서 정말 선을 이뤄야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곧 교회 밖 사람과도 함께 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약 본문 말씀에 나오는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야엘의 이야기입니다.

4.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야엘의 합심

배경을 살펴볼까요?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에게 억압을 당합니다. 그들은 구백 승의 철병거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가혹하리만큼 탄압했습니다. 물론 이 일의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역사가 한동안 진행되다가, 조금 살만하면 또 범죄를 저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1절을 보면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라고 말씀합니다. 사사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따라서 야빈 왕이 철병거 구백 대로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이십 년 동안 심히 학대합니다(삿 4:3). 이렇게 20년 동안이나 강력한 대적들에게 억압을 당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20년이 지난 다음 비로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 드보라와 바락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삿 4:4-5)

그러자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한 남편의 아내요, 여선지자였습니다. 사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일을 합니다. 드보라를 여선지자로 불렀으니, 그녀는 사사로 부름을 받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로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또 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보라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드보라는 재판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사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사사로 부름받은 드보라는 야빈과의 전쟁을 위해 군대 지휘관인 바락을 부릅니다. 말씀을 볼까요?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삿 4:6-7)

그런데 바락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삿 4:8)” 여기서 우리는 바락이 겁쟁이나 졸장부가 아닐까 오해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락은 드보라 사사를 의지한 것이 아니라, 드보라 사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가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내가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 바락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

그렇습니다. 바락은 겁쟁이나 졸장부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시스라 군대와 전투를 벌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삿 4:8-10)

바락은 드보라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손 강에 집결해 있는 시스라의 모든 병거와 군대를 향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 다볼산에서 내려갔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대단히 무모한 공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스라 군대는 시시한 군대가 아닙니다. 철 병거가 무려 구백 승이나 됩니다.

이 철병거는 오늘날로 말하면 탱크나 마찬가지입니다. 두꺼운 가죽이나 철로 사방을 에워싸서 그 병거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떠한 칼이나 활이나 창이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조그맣게 나 있는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며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따라서 철병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시스라 군대에는 이러한 철병거가 구백 승이나 있는데 반해, 이스라엘에는 한 대의 철병거도 없었습니다. 철병거는 커녕, 아직 변변한 칼조차 없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볼까요? 이때까지도 이스라엘 온 땅에 철을 다룰 줄 아는 철공이 없었습니다. 사울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외에는 그 누구도 칼이나 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울 시대에도 아직 이스라엘에는 철기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울 시대보다 170여 년 앞선 바락 시대에는 어땠을까요?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탱크라고 할 수 있는 철병거로 중무장한 시스라 군대를 향해, 바락은 겨우 1만 명의 보병부대를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믿음입니다. 드보라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강력한 시스라 군대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은 아니지만,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결국에 바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시스라는 철병거를 다 놓아두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습니다.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야엘과 시스라>(1620)

그리고 도망친 시스라의 막사로 나중에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과 방망이를 들고 들어가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본문 21절입니다.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삿 4:21-22)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진멸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와 같이 이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삿 4:23-24)

이렇게 드보라 이야기에서는 세 사람이 협력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드보라 이야기 이전에 나오는 옷니엘과 에훗, 그리고 드보라 이후에 나오는 기드온과 입다, 그리고 삼손 이야기에서는 한 사람의 사사가 구원자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드보라 이야기에서는 재판과 예언을 담당한 사사 겸 예언자인 드보라와 전쟁 지휘관을 담당한 바락, 그리고 적장 암살자 역할을 한 야엘, 이렇게 세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야엘은 모세의 집안과 연관이 있지만, 겐 사람으로서 비-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각각 독특성을 가진 세 사람이 협력해서 상호보완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토끼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석가모니가 말씀하셨듯이, “그때의 그 범지는 저 제화갈라 부처님이요, 토끼는 내 몸이며, 원숭이는 저 사리불이요, 여우는 저 아난이며, 수달은 저 목건련이니라.” 그렇습니다. 석가모니의 말을 분석해보면, 토끼만 보시행, 곧 살신성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 여우, 수달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보시행을 한 것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동물들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3년 계묘년에 토끼와 원숭이, 여우와 수달처럼 남을 돕는 자비의 보살행, 우리 기독교식으로 말씀드리면 십자가 사랑을 실천함으로 교회가 진정 교회다워지기를, 성도가 진정 성도다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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