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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맥(僊脈)신학과 도맥신학: 한국의 종교 영성과 기독교 영성

기사승인 2023.01.25  15: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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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이호재, 『선맥과 풍류해석학으로 본 한국 종교와 한국교회』 (동연, 2022)

▲ 변상규 소장

선교사가 오기 전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을까?

1986년 신학대학에 입학하고 우연히 기독교 서점에서 『제소리』라는 책 제목에 끌려 한참 그 책을 탐구한 적이 있었다. 김흥호 선생의 저서였는데 다석 유영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성서를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라는 새로운 관점이 큰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당시는 독재 타도를 외치며 최류탄이 학교 후문에서 터지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상황에 대한 저항으로 민중신학에 흥미를 느껴 이를 탐구하던 중 함석헌이라는 분이 살아 계시다는 말에 그분의 강연을 몇 번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분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원제가 『성서로 본 조선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서적 관점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십자가의 수난으로 푸는 함석헌 선생의 관점은 책을 읽는 내내 예수의 심정으로 역사를 품게 했다.

그런데 그 함 선생님의 스승이 다석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다석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은 충동이 신학 공부를 하는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당시 학교 축제 기간에 외부에서 새로운 신학을 강의한다는 몇 교수들을 초청했는데 그 중 얼마 전에 작고하신 유동식 교수가 있었다. 강의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말은 “여러분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120년 전에 선교사들 통해 알려졌다면 그 전에 하나님은 이 나라에서 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인데 그게 이해됩니까?”라는 말이었다. 유동식 교수는 1970년대 이후 폭발적인 기독교의 성장 이면에는 한국인의 심성 안에 무교, 불교, 유교라는 풍부한 종교성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강의를 하였다.

그러나 내가 있던 학교는 ‘기독교 외에는 구원은 없다’라는 근본주의적 신학에 기반해 신학을 가르치던 곳이었기에 나는 늘 미국적 복음만 복음일까를 고민하였다. 그래서 신학대학 졸업 후 곧 서울 냉천동의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가서 청강생으로 3년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나도 신학 좀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당시 『기독교사상』이나 『신학사상』 같은 논문들이 잘 읽혀지지가 않았다. 보니 필진들 대부분이 한신대와 감신대 교수들이어서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감신대에 가서 공부를 해 보고 싶었다. 그때 책으로만 뵈었던 김흥호 선생님이 이화여대를 은퇴하시고 감신대 종교철학과에서 강의하시게 되어 몇 번 그분의 강의를 듣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그때 내 뒤에서 연필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계신 흰머리의 교수님이 변선환 교수임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변선환 교수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학교에서 불명예 퇴진을 하는 모습도 보았다. 나는 많은 지식이 없었으나 변선환 교수를 그렇게까지 단죄하는 것은 교권의 횡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열반이 없듯, 불교에 구원이 없다’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원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개념인데 불교는 하나님 창조주 개념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시절부터 나름 선불교에 대해 공부하면서 붓다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닮아야 할 분이라 생각했다. 물론 불교의 교리가 기독교의 교리와 충돌하는 면이 없지 않으나 불교라는 종교가 기독교가 타도해야 할 종교라 생각지 않았다. 하버드대 종교학 교수였던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란 전통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정의하였다.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신다 해도 불교 전통이 사라지겠는가? 또 사라져야만 예수님의 직성이 풀리시겠는가? 전도도 필요하고 선교도 필요하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전도해야 그리스도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했다. 대화 자체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면 그건 애초에 진실이나 진리가 없다는 말인데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얕지 않음을 10년 넘는 신학수업을 통해 자각하게 되었다. 모든 신앙은 결국 영성에서 만난다. 그 영성에서 어느 것을 택해 내 실존을 던질 수 있는 궁극적 신앙으로 삼느냐 라는 결단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화 자체의 거부는 근대 서구식민지 사관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저급한 가치인 것이다. 내 종교가 소중하듯 남의 종교도 소중히 하라고 예수의 황금률을 달리 표현하면 비성서적일까?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나는 20대부터 지금까지 성서신학, 철학, 심리학 분야의 신간을 늘 구독해왔다. 그러던 중 신간 코너에 변찬린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저자가 『성경의 원리』, 그것도 세 권이나 상, 중, 하로 출간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출판사가 다른 곳도 아닌 수준 높은 신학 저서를 발간한다는 한국신학연구소였다. 처음에는 기장 쪽의 원로 목사님의 유작이겠지 싶어 한 권을 구입해 보다가 왠지 글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이 정도 책을 쓸 정도면 조직신학적으로나 성서신학적으로나 종교신학적 지식이 상당해야 했고 거기다 유·불·도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데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굴까 싶었다. 안타깝게도 생존하는 분이 아니었고 너무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분이라 더더욱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 책을 대략 본 후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글을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전화 한 통이 왔다. “안녕하세요 변 교수님, 이호재라는 사람입니다” 이호재 교수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교수님을 만나 뵙지 못했지만 몇 번의 장시간 전화를 통해 몇 가지를 느끼게 되었다. 대화 중에 열등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즉 성서학을 전공한 분도 아닌데 성서에 대해 대단히 박식하셨다. 그리고 당신은 신앙인은 아니라 하시는데 어느 신앙인보다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비유지만 변찬린이라는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 같은 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변찬린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그분의 사유와 삶을 전하고 싶은 열정이 가득함을 보았다. 그럼 도대체 변찬린은 누구이며 이분은 어떤 사유를 갖고 성서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어왔을까?

이호재 교수는 몇 권의 저서를 통해 이미 변찬린의 종교 및 신학 사상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이 있다. 그러다 최근 『선맥과 풍류해석학으로 본 한국종교와 한국교회』(동연 刊)라는 저서를 통해 그간 연구한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역작을 출간하였다.

나는 목회상담을 전공하였고 프로이트와 칼 융, 대상관계이론 등을 공부하고 가르치기에 이 책에 관심은 있었으나 서평이나 독후감을 쓸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으로 며칠 만에 독파하였다. 한 마디로 내공이 깊은 책이었다. 인류 종교사에서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를 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볼 수 있었다. 부족한 사람에게 서평을 써 보라 권해주신 마음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 책은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사는 지성인들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 권하고 싶다. 이 책이 어려운 게 아니라 너무 쉬운 책만 읽다 보니 이런 책을 소화해 낼 엄두가 안나는 한국교회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조선 정신, 예수의 Incanation(화육)과 선맥 르네상스

신학 공부를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서양철학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가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을 했을까. 플라톤과 이데아를 모르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를 제하고 루터 칼뱅을 논할 수 있을까, 아무리 데리다와 들뢰즈가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플라톤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마치 프로이트를 비판하고 그의 성이론이 철 지난 이론이라 주장하지만 늘 어느 시점에는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운동(라캉 학파)이 생겨나듯 플라톤의 중요성은 그를 철학의 비판대 위에 올려놓는다 해도 그 중요성은 감소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국 사람으로 버터와 포도주 대신 된장과 막걸리를 마시고 산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리 양복을 입어도 명절 때는 한복이 어울리듯 우리의 신학함이 서양 양복만 필요한 게 아니라 동양 한복같은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하곤 했다. 십 년 전 교육방송에서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라는 강연은 그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을 되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전에 한길사에서 출간한 함석헌 전집을 통해 노자 장자를 읽었고 그 전에 김흥호 선생님의 전집을 통해서 노자와 장자의 사유를 배웠지만 강연으로 만난 도올의 강의도 나름 의미가 있었다. 풍우란과 모종삼과 같은 대학자를 만난 건 도올의 강의를 통해 얻은 수확이다. 지금도 신학대학 커리큘럼에서 철학개론은 서양철학이다. 동양철학은 선택과목이거나 아예 없는 학교가 다수다. 이런 면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어떻게 진리를 밝혀주는 인식의 틀이 서양사람들의 사유에서만 가능했겠는가? 이호재 교수의 말처럼 한국의 칼 바르트, 한국의 불트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원효, 기독교의 고운(최치원), 기독교의 퇴계와 율곡이 필요”한 것(226쪽)이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구스타프 칼 융(Carl Gustav Jung)은 자신의 저서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어느 시대건 사람들의 종교성은 넘쳐 흘렀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그 종교성을 담아줄 종교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이 말을 보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며 어느 시대든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전인(영, 혼, 육)이 갈급한 저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들이 채워지지 않은 영성의 갈망을 부르짖고 있으나 어느 시대든지 종교지도자들은 교리 싸움과 자기들 권위와 사익을 채우는데 바빴을 뿐 진리를 위해 헌신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게 모든 시대의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변찬린이 성서를 대하는 마음의 두 가지 태도인 선맥과 무맥이라는 관점은 지금 및 앞으로의 세대에게 많은 영감을 시사한다. 이호재 교수는 선맥은 “영생”이며 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 가치를 언급하는데 나는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에 영생의 초점이 있다 생각지는 않는다. 즉 하나님은 진리이시니 그 진리 되신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이 영생이며 그 영생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으로 가능케 되었으니 결국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하염없는 사랑과 은혜가 영생을 가능케 하며 영원히 살아감의 이유라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 이전의 사람들 역시 영생을 추구해왔으니 그것은 자연 신학적으로 보면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면에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집단무의식적인 사유(원형적인 사유)를 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생을 이해하는 관점이 우리 민족의 뿌리라 알려진 고조선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김흥호 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식물의 뿌리는 땅속을 향하지만 인간의 뿌리가 되는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다고 말이다. 영성의 시작은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닌가 싶다. 영성은 시대를 초월하고 가치를 초월하며 종교도 초월한다. 그런 면에서 이호재 교수의 글 중 가장 감동을 준 부분이 있으니 “무한한 창조 세대의 우주 역사 속에 유한한 지구 역사라는 관점에서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주장(25쪽)이다. 이렇게 읽을 때 비로소 세계 경전은 초종교와 초과학의 시대에도 현존하는 인간과 관계성을 갖고 재현성을 가진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말이다. 즉 이 책은 영적인 노마디즘(Nomadism)을 지향한다.

이호재 교수는 영성의 대폭발은 궁극적 인간을 탄생시키는 영생의 기제이며 이 영생 기제가 바로 “선맥(僊脈)”이라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에 무한한 동의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야스퍼스가 주장한 “축의 시대”를 지양(止揚)해야 할 필요를 말한다. 고조선의 정신이 하늘을 우러른 마음이요 태양, 빛, 광명을 바라는 마음이라 본다. 이런 빛 숭상의 마음은 빛 자체가 되고자 했던 알타이 문화의 한민족의 뿌리인 동이족의 마음의 기층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분명 자연 신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모두 다 존중받고 그 어떤 폭력적 지배 계급에 통제되지 않은 자유롭고 모두의 삶과 생명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과 그 궤(軌)를 같이한다 볼 수 있다. 이호재 교수는 단지 복고지향적인 고조선 문명의 선맥사상을 재조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초극한 초과학과 탈 문명의 시대에 “새 축 시대 문명의 새벽을 여는 풍류-선맥 르네상스를 전망”하는 궁극적 인간의 새로운 화두로 제시한다.

기독교가 이단이라 말하는 신앙이나 신흥 종교라 말하는 모든 종교를 보면 그 지향성 하나만큼은 모두 다 잘 살고 모두 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을 전하지 않은가. 그런 인류의 보편 정신의 뿌리는 각자의 각론이 다르더라도 그 핵심에서는 같은 소리를 내고 있음은 분명한 사살이다. 나는 누구보다 구원은 예수로 말미암아 있다고 믿는 자이지만 그러나 현실을 보면 내가 살아가는 지구라는 땅 자체가 죽어가고 기후 위기로 인류가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매일 목도하며 살지 않은가. 예수 구원이라는 특수한 가치만 보편 가치라 말하지 말고 교회가 하나님의 몸인 자연을 강탈하는 자본주의와 획일적인 공산주의의 좁은 식견을 타파하고 인류의 보편 가치인 홍익인간(Humanitarian ideal, 한자보다 영어가 더 의미가 와 닿았다)의 정신을 공유하고 연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홍익인간의 정신의 근원으로 선(僊)사상이 있는 것이다. 변찬린 종교신학의 뿌리는 엄청난 광의적 금맥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에 “나를 반대하지 않은 자는 나를 위하는 자니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는 생명이다. 예수는 궁극적 홍익인간의 화육자이시다. 그런 예수의 정신이 고조선의 선맥정신을 포괄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변찬린은 예수처럼 길지 않은 삶을 살다 간 은장(隱藏)의 구도자였다. 그의 몸은 사라졌으나 그의 글과 사유는 영원한 얼이 되었다. 이호재 교수는 『성경의 원리』를 통한 선맥신학은 동이족의 선맥과 부활 신앙을 포월하는 해석학적 준거로 전개된 동방신학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서구사회에 우리 한국인의 심성으로 해석된 성서해석(성경의 원리)과 동양적 심성으로 형성시킨 도맥신학(道脈神學)을 이 책에서 제안한다. 변찬린이 외롭게 걸어갔던 그 선맥의 구도자적 영성은 이 혼란한 세상을 포월하여 갈급한 영성의 시대에 바람처럼 불어올 것이다. 이 책은 그 이정표가 된다.

필자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하고 (목회상담) 침례신학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와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를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특임교수이자 변상규 정신분석 대상관계연구소 소장이다.(https://blog.naver.com/jesusbyun)

변상규 소장(정신분석 대상관계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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