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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이루는 아가페 사랑

기사승인 2023.01.07  01: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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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아가페와 에로스 (3)

▲ Sandro Botticelli, 「Lamentation of Christ」 (c 1490-1495) ⓒWikipedia

바르트는 단지 아가페와 에로스의 대립과 차이를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1) 아가페와 에로스의 대립에 관한 우리의 마지막 말은 “화해의 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가페와 에로스 사이에 있는 대립을 약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아가페는 에로스가 될 수 없고, 에로스는 아가페로 변할 수 없다. 하나의 사랑은 다른 사랑과 혼동되거나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2)

하나님은 여전히 에로스적으로 사랑하는 인간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의지되고 조성된 피조물로 남아 있다. 인간은 그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길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면, 아가페는 에로스적인 인간에게 긍정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CD Ⅳ/2, 748).

그러나, 물론, 이것은 그의 에로스적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이웃을 멀리하고 대적하는 에로스적 인간에 대하여 화해의 메시지가 선포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로스의 포로가 되어 있는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적 인간에 대해 선포되는 화해의 말의 내용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여기서 그의 화해론의 핵심적인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인간의 죄의 용서와 구원, 곧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사건에 의하여 인간은 저주받은 버려진 존재에서 선택된 존재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원수에서 그의 자녀와 친구로 넘어간다.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심판과 부정(Nein)을 떠맡고 우리에게는 생명과 자유와 해방을 주셨다(CD Ⅳ/1, 175 이하 참고). 이 화해의 사건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받아들이고 책임지신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에로스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조차도 똑같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CD Ⅳ/2, 749).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에로스적인 인간이 그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낫게 그를 이해하신다는 것이고, 그가 스스로 보살피고 보살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낫게 그를 보살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에로스의 왕국에서 그의 사랑의 왕국으로 불러내실 때 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를 내어주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에로스에서 분리된 사람과 아직 에로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사이에서 행해져야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인간을 낯설고, 냉혹하고 음울한 법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만약 에로스적 인간에게 어떤 법이 제시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폐쇄적이고 저항적이고 적대적인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법’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에로스를 거절하고 아가페를 위하여 결단하라고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은 빛과 약속과 기쁨의 메시지이지 어둠과 위협과 슬픔의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Ibid.).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사랑은 참된 의미에서 인간의 해방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자신을 구하고, 그 자신의 구원자가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결국, 앞에서 언급했던, 어떤 “순환의 형식”, 곧 “파멸의 원”(CD Ⅳ/2, 750)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와 같이 단지 ‘파멸의 원’을 벗어나는 것으로써만 그는 참된 그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파멸의 원’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기독교적 사랑의 필수조건(conditio sine qua non)이다(Ibid.).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르트는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사건에 주목한다:

“이 화해사건에서 인간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하나님을 인간과 연합시키는 완전한 사랑이 일어났다. 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란 없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왜냐하면 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 자신을 위하여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때에 양쪽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궁핍, 소원, 욕망이 아니라 단순히 서로를 위하여 베푸는 자세로 실존하는 자유이다. 이것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 자신의 자유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베풀어진 인간의 자유이다. 이것이 ‘아가페’이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요, 이 내려옴의 힘에 의하여 동시에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간다. 아가페는 동일한 주권을 지닌 두 가지 운동,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 단 하나의 운동이다.”(ET, 189)

이와 같이 위로부터 오는 아가페 사랑을 참으로 경험한 인간은 삶을 각성시키고 그의 삶을 변혁하는 아가페의 사랑의 강물 속에 끌려들게 되고(3), 더 이상 그 자신의 자유와 영광을 바라거나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여전히 그의 모든 자유와 영광 가운데 있는 하나님으로 계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료 이웃에게 내어주는 인간은 이미 진정한 자유와 영광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4)

그가 바라고 추구하던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에로스 사랑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이미 획득했다. 아가페 사랑을 따라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가 ‘이카루스의 날개’와 에로스 사랑의 자기 주장으로 도달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바로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아가페를 참으로 경험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자유와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에서 보다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CD Ⅳ/2, 750).

미주

(1) 바르트는 몇번이고 부분적으로는 동의하나 부분적으로는 비판하면서 안데르스 니그렌(A. Nygren)의 유명한 저서, Agape and Eros, tr. by P. S. Watson, London: S.P.C.K, 1954를 지적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니그렌은 아가페와 에로스 사이에서 단지 대립만을, 곧 “본래적인 관계의 결여”만을 보았을 뿐이다(CDⅣ/2, 730).

(2) 바르트에 의하면 중세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어거스틴에게서 배웠던 ‘자비’(caritas)는 성서적인 아가페와 헬라적 에로스의 종합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랑은 결코 “단 하나의 사랑”으로 종합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에로스적인 인간이 아가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에 힘입어 아가페적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에로스적 인간이 아가페적인 인간이 되거나, 아가페 사랑이 에로스 사랑으로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가페와 에로스를 혼동하거나 혼합하고, 이 둘을 ‘종합’ 혹은 ‘타협’시키고자 할 때, 거기서는 언제나 “그 모든 형식들에서 움켜잡고, 정복하고, 소유하는 사랑”만이 생겨날 뿐이다(CDⅣ/2, 737, 734). 이런 점에서 아가페와 에로스를 혼동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에로스적이라고 말하는 몰트만은 좀더 신약성서의 증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J. Moltmann, Der Geist des Lebens: 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1991), 김균진 옮김, 「생명의 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344-348, 특히 346쪽을 보라.

(3) 칼빈도 이러한 관점에서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해명한다. “사람의 믿음이 깨우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면,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가 간직하신 그 풍성한 행복을 알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번 감동을 받으면, 사람은 그 행복감에 압도되며 끌려가게 된다” Inst. Ⅲ. 2. 41.

(4) 참다운 자기발견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에 있다는 바르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선언에 근거하고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 8:35).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 이 말씀들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다. 그 말씀들은 에로스를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아가페를 묘사하고, 또한 에로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도달하고자 하지만 도달할 수 없고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바로 그 목표에 이미 도달해 있는 기독교인의 생명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말씀들은 이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를 책망하거나 심판하지도 않는다. 그 말씀들은 단지 그가, 그의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고 받아들여지고 수용되어졌고, 그래서 그가 자신을 구할 수 있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가 “나와 복음을 위하여”(막 8:35) 그의 생명을 잃고, 그가 추구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만 그에게 허락되고 주어지는 어떤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구원을 받고 참된 자신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CD Ⅳ/2, 751).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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