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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같은 부카르트 할아버지

기사승인 2022.12.16  0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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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른후트의 사람들을 만나다 (1)

▲ 자신을 의심 많은 도마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겸손한 부카르트 할아버지는 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살았다. ⓒ홍명희

만약 헤른후트가 고대 피라미드처럼 건물과 그 땅만 남는다면, 아마 관광객으로만 먹고사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른후트는 역사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고 있다. 그분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헤른후트의 생동감 넘치는 삶의 이야기들을 엿보고자 한다.

우리는 교회의 2층 조그만 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보통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박물관 닫는 시간에 부커르트 씨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부카르트 형제님은 언제부터 헤른후트에서 사셨나요?

저는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곳이 에버스 도르프의 교회당 안이었어요. 아버지가 목사님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항상 함께하셨던 것 같네요. 저는 이 이야기를 항상 듣고 자랐고, 어느 사이엔가 제 마음에 나는 교회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7남매였는데, 아무도 아버지가 가신 목회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막내인 제가 신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 제가 알기론 그 당시, 공산 치하에서 신학을 하면 박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심한 불이익을 당했다고 하던데요?

네. 그런데 헤른후트는 섬 같았어요. 온 주변이 바다여서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는 섬과 같은, 지켜짐이 있었죠. 해외 많은 방문객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심한 관리를 하지 못했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문제가 없었죠. 그러나 문제는 신학이 저랑 안 맞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 거죠. 그래서 교회를 위하되, 좀 실천적인 것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시기에, 교회와 디아코니아의 직원들을 위해 잠시 주방장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목사가 되는 것보다는 교회를 돕는 직을 위해 더 공부하는 기간을 갖게 되었죠.

▲ 그러시군요. 그러고 나서 맡으신 일이 궁금합니다. 교회를 위하되, 목회자의 길이 아닌 길이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독일인으로서 나치 시대가 너무 부끄러운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유대인뿐 아니라 장애인들까지 학살할 수 있었을까 ….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장애인들을 교회가 돌보고 있었는데, 그 일을 전담해야겠다는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디아코니아를 세우게 되었죠. 그게 1975년이었습니다.

▲ 그래도 어려웠던 시대였는데 공산당 사람들 눈치 볼 일은 없으셨나요?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더라고요. 모든 학교기관은 그들의 지도 아래로 들어갔지만, 장애인에 관한 건은 교회가 맡는다고 주장하여, 독립을 안 시키고 교회 기관에 속한 것으로 하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그들을 맡아서 교육하고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 그럼 구체적으로 장애인들을 위해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먼저 그들에게 우리 집사람이 음악을 가르치며 음악치료를 했고, 또한 공동으로 사는 주거도 마련했어요. 작게나마 수공예를 할 수 있는 작업실을 마련하여 사실상 직업학교를 운영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지금 있는 학교는 통독 후에 정식으로 인가가 나게 되었죠.

▲ 사모님이 도우셨군요. 어떻게 결혼하셨는지 궁금해지는데요?

헤른후트로 오기 전에 다른 교회에서 성가대에서 지휘하고 있던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죠. 제가 항상 교회 일로 바쁠 때도 늘 등을 힘껏 밀어주었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젠도르프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투사와 같은 부부(Streitehe)는 아니어도, 교회를 위한 일에서는 늘 함께 해왔습니다. 4명의 자녀도 다 하나님 안에서, 늘 교회 안에 있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 디아코니아에서 몇 년 일하신 거예요?

1977년에 전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이 되어, 2009년에 마치게 되었어요. 거의 30년을 온몸과 마음을 담아 일했습니다. 집도 바로 장애인 숙소 건너편에 마련하여, 수시로 드나들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교회를 섬길 게 무엇인지 늘 찾고 도왔습니다.

▲ 30년 동안 수많은 헌신을 통해 디아코니아 장애 복지 재단이 이렇게 자란 것이군요. 저는 정말이지 성도들의 무덤이 있는 곳을 늘 정리하셔서, 그 일이 천직인 줄 알았습니다.

6000여 명의 성도로 채워지고 있는 하나님의 밭 동산은 제게는 또 다른 헌신 가운데, 정말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분들이 찾아와 함께 한 시간을 같이 일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잡초를 뽑는 단순한 일이었고 말도 잘 안 통했지만,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교제의 시간이었죠.

▲ 항상 아름답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제 겨울에는 휴식기가 찾아오겠네요?

네. 11월 중순부터 내년 봄이 시작할 때까지 저도 좀 쉬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봉사란 구석구석 할 일이 참 많답니다. 성도들의 무덤 관리하는 일을 어떻게 감당하는지에 대해, 교회에서 한동안 긴 토론을 통해 여러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매달 토요일 아침을 정해 놓고, 교우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으로 결덩을 했는데 제가 의도한 대로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토론보다는 단순하게 시간을 정해 일하다 보면 그 많던 일들도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 부카르트 씨네 부부ⓒ홍명희

▲ 아,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앞으로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나 사회에 걱정되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그건 아마도 개인주의라고 생각해요. 공동체보다 개인 위주로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공산주의 시대보다 우리를 더 힘겹게 한다고 봅니다. 물론 자유가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는 이루 말할 수 없죠. 그러나 민주주의는 우리 사이에 큰 격차를 만들었고, 또한 개인 위주의 삶을 지향하게 만들었어요.

▲ 그렇군요. 통일 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겠어요?

통일은 모두의 염원이었지만, 그 염원은 너무 감성적으로 흘렀고, 실제적인 우리의 삶은 당면 된 문제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교회도 사회도 술렁이기만 하고, 발 빠른 젊은이들은 서독으로 돈을 벌러 떠나 버렸지요. 구동독 땅은 버려진 것만 같은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 그런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디아코니아 장애복지단을 지키시고, 또한 하나님의 밭, 즉 성도들의 무덤을 지키신 노고가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너무나 훌륭하십니다.

아닙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도마 같은 사람입니다. 항상 의심이 많죠. 그런 믿음으로도 이만큼 사용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교회를 섬기시는 가운데, 가장 마음 아팠던 사건이 어떤 게 있을까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실 약 30여 년 전에, 몇몇 젊은 가족들이 방언을 받고 예배가 더 뜨거워야 한다며, 새로운 노래들을 유입하고 …. 결국은 그들은 자유롭게 예배하기 위해 예수 하우스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은 그들의 주장대로 우리가 진젠도르프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예배로는 만족을 못 한다는 것이었고, 우리야말로 더 나은 신앙인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진정 누가 더 나은 신앙인인가가 늘 마음에서 돕니다. 만약 제가 100여 년 전에 이곳에 있었던 자유주의 교회(성령파)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렇게 신앙을 배웠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어떻게 예배하느냐가 나은 신앙인을 가늠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진정으로만 예배하면 어떤 모양이든 다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않을까…? 생각돼요.

약 한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겸손하시고 늘 흙 묻은 바지를 입으시고 다니시는 그분의 모습에 우리나라로 치면, 가나안의 김용기 장로님 같은 어른이 아닌가 생각했다. 정말 감사해서, 한국적인 차 받침을 선물 드렸더니, 어린아이같이 활짝 웃으신다.

처음에 헤른후트에 왔을 때, 같은 종의 강아지를 데리고 계셔서 너무나 친근감 있게 다가간 분이다. 권위적인 모습이 전혀 없으셔서, 쉽게 인사도 나누었다. 언젠가는 무덤가 밖 언덕에 해바라기를 심으셨다. 무덤 변두리라고 아무렇게 두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그분의 성실성에 감탄했다. 또한 그렇게 많이 뵈었는데도, 사무총장이었다는 말을 처음 듣게 된 것이니, 얼마나 겸손한 분인지 알 것 같다. 

당신이 도마라고 칭하셨지만, 그것 또한 겸손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는 때로 얼마나 도마 같을 때가 많은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그 전부터 헤른후트 형제 교단의 뿌리를 둔 가문의 성도를 만났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손재주와 늘 많은 실질적인 일을 감당했던 모라비안의 후예였을 것이다. 300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라비안의 정신, 교회를 내 몸같이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 나는 다시 한번 게으름에서 벗어나, 이 헤른후트 교회의 회원으로서 더욱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한다.

홍명희 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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