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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먼저 지을 것인가?

기사승인 2022.12.04  04: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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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과 성전(스가랴 2:3-5)

▲ Rebuilding the Wall of Jerusalem (1886) ⓒgettyimages
3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들어가는 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기간을 보내는 가운데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지,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분을 기다리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겠다 하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한 두 번의 설교 말씀으로는 이를 다 전해드릴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배워왔던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시는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2022년의 마지막 한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2022년에도 여전히 코로나 이슈는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여전히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은 듯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어떤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도 돌아보시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붙잡아 둘 수 없기에 계속 흘러가고 있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 신앙의 삶도 여전히 그대로 흘러가기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오늘은 소예언서에 속하며 포로기 이후 예언자에 속하는 스가랴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시는 분이신지를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곱 환상

스가랴 1장 7절부터 6장 8절까지에는 스가랴가 밤 중에 본 환상이 나타납니다. 3장에 나타난 여호수아와 관련된 환상을 뺀다면, 그가 본 환상은 일곱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3장에 나타난 여호수아의 환상을 빼는 이유는 나머지 환상들과 문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곱 개의 환상 속에서 스가랴는 자신을 인도하는 천사와 대화하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3장에 나타난 여호수아의 환상은 스가랴가 그냥 환상을 보았다는 내용만이 나타납니다. 이는 6장 9절 이하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1장 7절부터 세 개의 환상이 열거된 이후에 2장 7절부터 13절까지는 예언자 스가랴 자신의 선포가 나타나고, 3장에는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4장부터 다시 네 개의 환상이 나타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성경을 읽어온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숫자입니다. 아마도 스가랴는 7이라는 숫자에 맞춰 환상의 내용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가랴서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7개의 환상 중간에 자신의 선포와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을 첨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환상에는 세 종류의 말들과 붉은 말을 탄 사람에 관한 환상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하나님께 보고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일곱 번째 환상에는 또다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네 마리의 말과 병거가 나타납니다.

두 번째 환상에서는 이스라엘을 흩은 뿔과 대장장이의 환상이 나타나고, 여섯 번째 환상에서는 죄의 근원을 뒤주에 봉하고 천사들이 이를 옮기는 환상이 나타납니다. 두 번째 환상이 이스라엘의 파괴를 이야기한다면, 다섯 번째 환상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일곱 개의 환상은 가운데 놓인 네 번째 환상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환상은 스룹바벨과 성전에 관한 환상입니다. 3장의 여호수아 환상은 아마도 네 번째 환상에 나타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여호수아이기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곱 환상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환상에서 하나님께서는 폐허가 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이들을 불쌍히 여겨 돌아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성전이 건축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환상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기 기간동안 폐허로 남겨두셨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고통이 더 심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거두실 것이라는 선언으로 환상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스가랴의 환상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 구원이 이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굳게 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전과 성벽

우리는 역사서에 속하는 에스라-느헤미야와 예언서에 있는 학개, 스가랴를 통해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이 성전을 다시 건축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또 이들이 성전을 재건축하는 과정이 녹록하지만은 않았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이 거의 똑같기 때문에 한 권으로 읽어도 무방한 에스라-느헤미야는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성전을 건축하고 그 후에 성벽을 건축한 것처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이 성벽보다 성전을 먼저 건축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처음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 시기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 때로 대략 주전 538년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귀환한 시기는 아닥사스다 20년인 주전 445년입니다. 느헤미야의 경우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었고 성문이 불탔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복구 작업을 진행합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포로로 끌려오지 않고 그곳에 남아있던 이들이 환난을 당해서 성이 파괴되고 성벽이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귀환한 시기는 이미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지 100년 이상 지난 때입니다. 고레스 때에 귀환한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을 보면, 이미 처음 귀환 시기부터 성전 건축을 독려한 예언자들이 있었고, 성전 건축이 진행중이었습니다.

물론 에스라에 따르면 적대자들의 반발로 인해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느헤미야에 따르면 최소한 주전 430년 전에는 성벽 건축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에 나타난 연대를 따져본다면, 성전 건축은 420년 경에나 완료됩니다.

에스라에 나타난 연대가 상당히 부정확하기 때문에 에스라-느헤미야에 나타난 연대는 수정될 필요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거의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고 있고, 이 책이 에스라 뒤에 놓이긴 했지만, 실제 에스라보다 더 앞선 시기의 이야기를 전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아마도 초기 귀환 공동체 사이에서는 성벽과 성전에 대한 논쟁이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과연 폐허가 된 상태였는지는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문제이지만, 최소한 성전과 성벽은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귀환 공동체가 나라를 재건함에 있어서 성벽의 존재는 성전보다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만약 이들을 적대하는 국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거나, 페르시아가 이들에 대한 보호를 확실하게 보장해주었다면 성벽은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느헤미야에 나타난 상황을 본다면, 귀환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분명 그들 주변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왜 귀환 공동체를 위협했는지는 더 따져봐야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페르시아는 이들을 보호해주지 않았고, 속국에서 일어나는 국지적인 전쟁은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적대자들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환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 건축보다 성벽 건축에 더 우선시했을 것입니다. 학개 1장에 나타난 경고의 선포도 이러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합니다. 또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도 이러한 상황을 암시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셔서 그들 가운데 영광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세 번째 환상이고, 첫 번째 환상과 네 번째 환상이 성전 건축을 독려하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스가랴는 성벽보다 성전을 먼저 건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하는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 ‘성전과 성벽 무엇을 먼저 건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명확한 답이 나와있는 질문입니다.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벽을 먼저 건축해야 합니다. 특히나 자신들이 복귀해서 정착한 곳이 폐허가 된 상태라면 집을 만들고 성벽을 쌓는 일이 먼저입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 상태에서 신앙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벽이 먼저가 됩니다. 당시 귀환 공동체도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나 제사장 집단이 이에 반대하며 성전을 먼저 건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기반을 다져놔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이유는 없습니다. 신앙에 기대어 살 이유가 없어집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왕과 군대라는 수단을 통해 국가의 안정을 바랐던 것처럼, 우리도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우리의 삶은 하나님보다는 이러한 안정적 수단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성벽을 먼저 쌓아두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성벽이 너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지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벽이 있기에 적들이 침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벽이 되어 지켜주기에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시편의 시들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의 도피처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에게 와서 피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올바르게 나를 믿고 따르는 그 장소, 성전을 세운 그 장소에서 내가 너희의 성벽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특정한 순간에 우리를 도우시고 일으키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바르게 신앙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성벽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지킬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무시하거나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우리의 성벽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지키는 것은 내가 마련한 방책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성벽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대림절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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