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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족국가의 틀에서 본 우크라이나 전쟁

기사승인 2022.12.03  15: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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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와 젤렌스키 (3)

▲ 지난 11월 우크라이나 루키우에서 사망한 유리 체르넨코 상사의 장례식 ⓒGetty Image

근대성의 두 얼굴

미국 혁명(1775)과 프랑스 혁명(1789)과 더불어 나타나는 국제 정치질서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은 인종과 민족에 대한 국가형성과 종교의 역할에 관심을 둔다. 정치, 사회 문화적 틀에서 민주주의와 근대성 그리고 자본주의 성격이 세계체제와 더불어 다루어진다. 여기서 근대와 자본주의 유형은 사회계약론을 기초로 한 공공선과 국민적 승인, 식민지 비판, 그리고 경제의 분배정의로 요약된다.

이것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해외시장을 찾아 나선 식민주의와 여기에 문명선교의 불을 지른 사회 진화론(허버트 스펜서)이나 자유방임주의(존 스튜워트 밀)와는 각을 세운다. 후자를 베버는 약탈 자본주의 유형에 속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았다. 이것은 여전히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로 이어진다. 식민지 근대성이 신자유주의 옷으로 갈아입고 등장한다.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막을 내리고 있다.

민족과 인종은 다르다

민족 이념은 개별국가들의 역사에서 경험적으로 모호하게 드러나며, 해명하기 위해 다양한 조건들이 분석의 틀로 들어와야 한다. 각 나라마다 민족 감정과 위신 그리고 이해 관계는 다를 수가 있다. 폴란드계 독일인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을 향해 총을 들지만,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향해 총을 들지는 않는다. 북한과 일본과 축구시합을 한다면 한국의 민족정서는 식민지에 대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북한을 응원할 것이다. 물론 일본을 응원하는 국내의 양복입은 사무라이들도 있을 것이다.

민족 문제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식민지 해방투쟁에서이다.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를 거치면서 이전 식민지를 경험했던 연방국가들에서 ‘민족문제’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문제를 넘어서서 ‘인종’ 개념을 여과없이 ‘민족’ 개념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계급투쟁의 계보학은 인종투쟁이라는 푸코의 분석은 옳다.

사회주의권에서도 인종 이데올로기가 출몰하고 이것은 스탈린 시대에 특권을 누린 러시아 인종정책에서도 잘 볼 수가 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스탈린 집단 대농장 시대에 기아의 대참사로 굶어죽는 과정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인종의 위신과 민족문제는 이미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역사적인 숙명을 배태한다.

우크라이나를 완충국가로 세우려고 했던 오바마 정부의 국제 정치전략에 앞서,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적인 차별의 경험 그리고 떼죽음을 당한 기아에서 이들의 공동운명과 연대감정이 찾아질 수가 있다. 이러한 정치 문화적인 접근은 자본주의와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과 연방국가의 관련성을 하찮게 보는 기능주의적인 시도를 넘어선다. 그런가 하면 포스트콜로니얼 사회에서 민족과 인종을 동일시하고 분단/민족 모순의 해결방식에 과몰입 하고, 세계체제론에서 드러나는 현실정치를 무시하는 정치적 낭만주의와도 거리를 둔다.

오히려 독일 통일과정에서 드러나는 비판적 자유주의와 문화적 연대감정에 더 많은 주목을 한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해방투쟁을 인터내셔날 계급투쟁의 일부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시도와도 갈라선다. 간략히 말하면, 민족은 연방국가의 가치를 존중하며, 시민사회의 기초가 되지 혈통을 중심으로하는 인종공동체와는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 민족주의다.

인정투쟁과 비판적 자유주의

알제리 해방전쟁에서 프란츠 파농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헤겔이었고, “정신현상학”에서 전개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었다. 식민지배의 흑인들의 인정욕구와 백인처럼 되고 싶은 모방의 심리학, 그리고 백인 주인의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열망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흑인의 문화 정체성을 찾으려는 네그리테(흑인성)와 해방투쟁이 공존한다. 이러한 문화 인정투쟁이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출발을 알린다. 프랑스 민족의 문명선교는 알제리 민족의 해방투쟁에서 급제동에 걸린다. 이것은 프랑스 인도차이나 식민지배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문제로 인해 마오쩌둥(1893-1976)의 중국은 호치민(1890-1969)의 베트남과 전쟁에 돌입하기도 했다 (1979). 누가 좌파이고 우파인가? 단순히 스탈린의 진영논리로만 가를 수 없는 게 국제 정치질서이다. 제국주의 중국에 저항하는 베트남의 문화적인 가치와 크메르 루즈치하에서 박해를 당하는 베트남 민족에 대한 연대감정이 깊게 작용한다.

일급관료이자 유교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호치민이 서구 비판적 자유주의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어를 습득했고, 레닌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경력을 정치 사회학자들은 무시하지 않았다. 1945년 전개되는 국제정치 질서에 대한 날카로운 호치민의 분석은 베트남 근대국가를 세워나가는데 민족정치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미국의 정치학자들이나 양심적인 세력에게 격한 감동을 준 것은 호치민의 독립연설에서 사회계약론의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문장을 꿰고 있었고, 이것이 미국정치의 내재적 비판의 원류라는 시선으로 보면 오히려 미국에 한 수 가르쳐 준 셈이다. 1969년 9월 12일 타임지가 “북 베트남의 새로운 시대”란 타이틀로 그를 추모하는 특집기사를 실었는데, 이는 그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었다. 호치민은 미국의 핵심 가치를 전쟁을 통해 강타했고 미국의 공론장과 지식인들을 수치스럽게했다.

베버는 중국의 유교를 평가하면서 맹가에게서 ‘민심은 천심’이라는 정치사상에 주목했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지배가 중국 사회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민주적인 방향으로 이끄리라는 예측도 이와 무관하지가 않다. 문제는 중국의 교육제도와 관료 지배체제가 얼마나 민중들과 소통하고 신뢰의 관계로 들어설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가치 힙리성의 정치를 사회주의나 유교사회보다는 사회 계약론의 비판적 자유주의와 의회 민주주의 전통에서 확인했다.

KGB 스파이 출신 푸틴은 그의 힘의 논리에 천착하기 때문에 저항적 민족주의와 여기에 결부된 민주주의와 문화적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푸틴의 문명선교 또는 ‘군사작전’이라는 담론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위신과 투쟁 앞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민족은 문화 가치적인 개념이며, 공동의 역사적 운명과 생사를 같이 나눈 경험이 근대의 정치 공동체인 국가를 연방 또는 민족국가로 형성한다. 근대 국가의 성격을 특징짓는 것은 민족의 유대와 문화적 공유 가치이다.

정치 공동체로서 국가는 주어진 영토에 대한 합법적인 공권력을 독점한다. 그리고 안보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연방을 수호한다. 문화적 가치로서 민족과 정치적 가치로서 국가가 합류되는 것이 연방 내지 민족국가(nation-state)가 된다. 여기서 민족 개념은 영토와 관련 되고 근대 적인 의미에서 영토가 없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별 민족국가는 서구에서 가톨 릭의 교황권이나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해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국제법의 중요성이 휴고 그로티우스(1583-1645)의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국제 정치문제가 해결된다. 여기에 여타의 인종 낭만주의나 종교적 가치가 들어설 틈이 없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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