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刻苦(각고)의 改革(개혁): 종교개혁과 해방신학

기사승인 2022.11.28  01: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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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일 기념 지면 특별호 칼럼 (1)

▲ 교회는 아무 이질감 없이 자본주의를 위해 복무해 왔고 하나님을 시장을 대체해 왔다. ⓒGetty Image
앞으로 5주 동안 연재될 칼럼들은 지난 10월31일 종교개혁일 맞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로부터 기고 받은 글들입니다. 자신들이 활동하는 분야와 종교개혁이라는 주제와 맞물려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별호 지면을 받지 못한 온라인 독자들을 위해 다시 게재합니다. 지면 특별호를 받기 원하시는 온라인 독자들께서는 newsecumenian@gmail.com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10월 31일, 종교개혁 50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일반적으로 개혁(改革)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이다. 어떤 사전은 친절하게 “개혁(改革)은 급진적이거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닌, 사회의 특정한 면의 점층적인 변화를 이끌고 고쳐나가는 사회 운동의 하나이다. 개혁 운동은 혁명과 같은 더 급진적인 사회 운동과는 구별한다.”라는 내용을 덧붙인다.

그런데 개혁이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이 단어가 그리 가볍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개(改)는 고칠 개(改)이고, 혁(革)은 가죽 혁(革)을 사용한다. 어원에서 살펴보면 개혁(改革)의 뜻은 가죽 혹은 피부를 고치거나 바꾸는 것이다. 가죽과 피부를 고치거나 바꾸는 것, 그리 간단하게 시행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작업은 매우 큰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며 또 이에 따라서 그 모양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원을 생각하면서 종교개혁 505주년에 생각하고자 하는 개혁은 가볍거나 혹은 단순한 겉모양의 고침만을 의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죽을 바꾸는 아픔을 수반하는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새기고 고치는 각(刻)에 의한 고통, 고(苦)가 따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개혁은 각고의 개혁일 수밖에 없다.

개혁은 간단한 리모델링이 아니다. 그것은 변혁이며 혁명이다. 요즘 우리에게 개혁이라는 단어가 좀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코로나 19로 인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혁(改革)은 왜 해야 하며 또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가죽을 간다.’라는 생각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죽 소파이다. 가죽이 낡아지고 헐게 되면 우리는 가죽 갈이 혹은 천갈이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개혁(改革)은 지금 상황에 대한 확실한 진단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오늘의 상황이 매우 나빠졌다는 것을 진단하고 깨닫는 순간부터 ‘가죽 갈이’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오늘 우리 기독교회는 어떤 상황에 있는 것일까?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의 기준을 완전히 변경시켰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정상(New Normal)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새로운 정상은 지금까지 우리 삶의 모습을 구축해 오는 데 기반이 되었던 ‘정상의 기준’이 폐기되었거나 점차 유효기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삶의 모습 형성은 새로운 정상 혹은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 혹은 기준의 변화는 인간 사회의 전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인류는 새로운 정상 혹은 기준에 맞춰 삶을 바꿔나가야 한다. 종교의 영역, 기독교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기독교)개혁은 정상(기준)의 유효 기간 종교 혹은 폐기와 더불어 등장하는 새로운 정상과 기준을 근거로 성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새로운 정상(기준)을 생각하는 시도를 해야 할까? 기독교 내에서 이런 측면의 담론이 이미 전개되어 왔음을 전제하면서, 몇 가지로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

첫째는 교리의 극복과 새로운 해석의 장이 펼쳐져야 한다. 중세 이후 서구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지배적 신학(교리체제)의 유효 기간의 종료로 인한 문제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며,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말한다. 그는 에베소서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러.’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의 진리를 오직 교리로부터 가늠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 버린(obsolete, outdated) 낡은 정상(기준)이 되었다, 예수와 성서의 진리는 교리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신비의 세계에 속해 있다. 이제 기독교는 교리에 대하여 오늘의 삶, 특히 코로나-19 국면의 삶의 정황으로부터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의 메시지를 지탱해 온 교리에 대하여 전면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만 ‘항상 개혁하는 교회’라는 개혁교회를 지속할 수 있다. 그래야만 기독교회는 코로나 국면을 지나는 오늘 사회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더불어서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면적인 신학 패러다임의 뒤집기 혹은 뒤바뀜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던 신학적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교리로 상징되는 옛 정상(old normal, 옛 기준)을 뛰어넘어 새로운 정상(new normal, 새로운 기준)으로 향하는 것은 아프다. 가죽(기준)을 벗겨내는 것은 각고(刻苦)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회는 아픔을 견디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과연 개혁(改革)을 이룰 수 있을까? 각고(刻苦)의 개혁(改革)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서구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살아왔으며 결국 시장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사상적 그리고 종교적 정당성의 도구로 살아왔음을 보아야 한다. 아마도 대다수 기독교인은 합리적 의심이나 문제 제기 없이 기독교와 자본주의 시장체제를 동일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회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시장이라는 우상에게 절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기독교회가 시장이라는 우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 새로운 신앙의 길을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옛 삶을 버리고 성장에서 탈성장의 경제, 그로 인한 기후 정의 실현과 생태적 삶, 서로 돌봄 민주주의, 상생과 나눔의 경제정치사회문화체제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 측면의 종교(기독교)개혁은 시장(자본주의)의 우상화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사상을 자유방임신학(laissez-faire Theology)이라고 부르는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 K. Galbraith)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는 “더욱 심오한 신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처럼 경제체제에도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양쪽(경제와 신학)은 동일하다.”라고 말한다. 만약 이 같은 경제학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계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과학기술과 경영체제의 혁명을 토대로 전개되는 현 국제경제 질서에서 내재적인 신학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교적 근거를 가지고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경제 질서를 움직이는 신학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

오늘 시대에서 종교개혁은 이 같은 시장체제에 대한 신학적 비판 없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 자본과 시장에 매몰되어 있는 기독교회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자본과 시장으로 상징되는 옛 정상(old normal, 옛 기준)을 뛰어넘어 새로운 정상(new normal, 새로운 기준)으로 향하는 것은 아프다. 가죽(기준)을 벗겨내는 것은 각고(刻苦)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회는 아픔을 견디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과연 개혁(改革)을 이룰수 있을까? 각고(刻苦)의 개혁(改革)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비관적인 질문을 뛰어넘어 만일 우리가 예수 부활 승리를 믿고 있다면 “각고의 개혁을 할수 있고 또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라 과감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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