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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

기사승인 2022.11.27  0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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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순간에(다니엘 3:16-18)

▲ "The Three Hebrews in the Fiery Furnace" from the Catacombs of Priscilla, Rome, Italy. (3-4C) ⓒWikipedia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들어가는 말

이번 주일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어쩌면 이 기간이 교회에 있어서는 가장 바쁜 기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교회가 11월부터 내년도 예산과 올해 결산을 정리하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기 때문에 재정적인 면에서도 바쁜 시기입니다.

또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절기이기 때문에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바쁜 시기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기간 중에는 아무래도 많은 행사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방역 지침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많은 교회가 한동안 치르지 못한 성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림절이 교회 재정을 정리하는 기간 또는 성탄 행사를 준비하는 기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만, 대림절을 지내는 우리의 마음은 여기에만 쏠려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 첫 주일에 저희는 다니엘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보다 더 앞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신앙의 확신 이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니엘서의 특징

다니엘서에는 특징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저희 성경에도 각주로 달려있지만, 2장 4절부터 7장 28절이 아람어로 적혀있고, 나머지는 히브리어로 적혀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 저자가 다르다는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편집층이 다르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입니다.

또는 한 개인 혹은 집단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특정 부분은 아람어로 기록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히브리어로 기록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병용한 의도를 밝혀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또 다른 특징은 70인역 헬라어 성경과 유대교 히브리어 성경에서의 위치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구약성경의 배열은 70인역을 따르고 있는데, 이때 다니엘은 예언서에 속해 있습니다. 12장 밖에 되지 않는 책이지만, 세부 분류에 있어서는 대예언서에 속하기도 합니다.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다니엘서는 성문서에 속합니다. 다니엘서는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 책이 성문서에 들어가 있는 점도 이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히브리어 성경을 엮은 이들은 다니엘서 안에서 묵시문학 또는 지혜문학의 색채를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헬라어 성경을 엮은 이들은 다니엘서에 나타난 다니엘을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언서와 묵시문학이 세부적인 특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타나지만, 큰 맥락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또는 회복이라는 주제로 연결되는 점도 있습니다.

다니엘서가 기록된 시기는 대략 기원전 2세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시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셀류코스, 셀류시드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셀레우코스 왕조는 대부분의 통치 기간 동안 종속국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해주었습니다. 이는 같은 시기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175년에 집권한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기존의 정책을 무시하고 유대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유대교 관습을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등불을 꺼버리기도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는 부정한 동물인 돼지 고기를 먹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유대교 박해라는 상황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묵시문학이 발달하도록 만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문학의 발달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유대인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을 통해 유대인들은 하스몬 왕조를 이룩하게 되기도 합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서 6장까지에 나타나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겪는 상황은 완전한 상상의 산물이라기보다 당시 유대인들이 당하고 있던 박해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박해의 순간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의 자세를 취할 것인지를 묻는 책이 다니엘서입니다.

만약 다니엘서를 특정 집단이 특정 의도를 가지고 작성한 것이라면, 박해 상황에서 신앙을 고양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을 당시 많은 나라의 공용어인 아람어로 작성했다는 점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대상들 앞에서 자신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의 선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다니엘서 2-7장은 간략하게 보자면, 왕의 꿈과 해석 – 박해와 구원 – 왕의 꿈과 해석 – 박해와 구원 – 다니엘의 환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당한 박해의 상황입니다.

사실 다니엘 3장의 이야기는 2장과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2장에서 다니엘은 아무도 해몽하지 못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하였고,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최고의 지혜자로 세웁니다. 그리고 그의 세 친구를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 세웁니다. 이런 행동과 동시에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3장으로 넘어오면서 느부갓네살은 뜬금없이 금신상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불태워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사건이 실제로 느부갓네살 시대에 일어난 일인지를 생각하는 일은 불필요합니다. 그리고 에피파네스 시절에 이와 똑같은 사건이 있었는지를 찾는 일도 중요해 보이진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신앙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에게 절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를 행하지 않았을 때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상황이 놓여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맹렬히 타는 불 속에 던져질 위기에 처합니다. 이는 6장에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입니다. 무조건 죽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되건, 생매장을 당해 죽게 되건, 칼에 찔려 죽게 되건 이들 앞에 놓인 것이 죽음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6장에 나타난 다니엘이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친구에게는 오직 두 가지의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죽을 것인지, 하나님을 버리고 살 것인지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자신들의 목숨보다 하나님을 택합니다.

보통 박해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두 가지 상황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는 박해로 인해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해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처한 상황과 그 결론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신앙을 지킨다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이야기는 분명 구원으로 끝나긴 합니다만 이 이야기는 구원받는 상황만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앞에서 금신상에 절하라고 말하는 느부갓네살에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 가운데서 건지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대답은 아마도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야 43장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느부갓네살에게 건낸 이들의 대답은 하나님을 믿기에 불길도 두렵지 않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18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지 않으실지라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기에 구원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걸었던 신앙인의 이야기입니다.

대가 없는 믿음

대림절 기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그 분이 행하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대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에 도와주신다는 대가를 바라며 믿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대가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마치 욥기에 나타난 사탄의 시험과도 같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허락을 구했던 것은 욥에게 주어진 대가를 반대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대가가 재산의 손실과 자녀의 죽음과 질병이라면 계속 하나님을 믿을 수 있냐는 것이 사탄의 시험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에, 세상을 운행하도록 이끄시는 분이시기에 그저 그 분을 믿고 섬길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대가를 주셔야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과거 교회에서는 늘 대가를 주시는 하나님을 강조해왔습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시고, 잘 믿으면 재산을 늘려주시고, 우리를 건강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신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하게 자리잡아 버렸습니다.

이런 생각은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금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간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회에 헌금하면 돈 빠져나가고 교회 가는데 시간도 버리게 되는데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냐고 질문하며 떠나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림절에 앞서 창조절 기간을 지내왔습니다. 구원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기에 앞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선한 길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선한 길은 내 재산이 늘어나는 길도 아니고 내 수명이 늘어나는 길도 아닙니다.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선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도 선하고 좋은 길이 될 줄 믿습니다.

대림절 기간에 대가를 바라는 신앙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은 결코 악한 길이 아님을 믿으시며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삶에 참된 평강과 은혜가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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