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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대통령 선거,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가?

기사승인 2022.11.03  15: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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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룰라 당선이 한국교회에게 던지는 의미

▲ 루이즈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지난 10월 30일에 치러진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FT

지난 10월 30일 밤늦게 브라질 국민들은 자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접하게 되었다. ‘루이즈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Luiz Inacio Rula Da Silva, 일명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소식에 많은 사람들은 만족감을 표시하였을 것이다.

왜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세계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 언론, 심지어 국제 과학 저널들까지 공개적으로 현 대통령 보우소나루(Bolsonaro) 후보자를 반대하여 루이즈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후보자를 지지했을까? 평생 좌파운동가(노동조합 대표, 노동당 원내대표, 2번에 걸친 브라질 대통령 역임)의 삶을 살아온 정치가 룰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잡지인 이코노미스트(Economist)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극우 정치인으로서 브라질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거의 700,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백신 보건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런데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브라질 금융 시장 대다수 자본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도대체 브라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브라질 현 정부의 코로나 전염병에 대한 잘못된 관리, 민간인의 무장허용 외에도 농업 부문의 경제적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삼림 벌채를 지원하는 정책은 생태학적 위기를 자초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문제를 넘어 세계에서 더 깊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브라질 대통령 선거를 비롯하여 다른 나라의 선거에서도 명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오늘 사회는 서로 대화와 소통의 능력과 기회를 잃어버린 채 급진적으로 분열하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 룰라가 51%의 유효 득표율로 선거에서 승리한 반면, 보우소나루는 49%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순한 양적인 분열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문명화의 길에서 반목과 갈등이 고조되어 쌍방 간의 문명화된 대화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에 선출된 현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신자유주의자와 그리고 보수적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과 선거동맹을 이루었다. 이들은 민주주의 법칙을 거부하고 권위주의적 정권을 이룩하고자 한다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던 바 있다. 이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정치세력은 대통령 2차 선거에서 룰라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중도 우파의 정치인(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포함)들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을 이루면서 선거에 임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문제는 더 이상 좌우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주의적이거나 파시스트적인 정부와 민주적 대통령 사이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결국 룰라가 이룩한 민주전선은 51%의 득표율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는 수십 년간의 군사독재(1964-1985) 이후에 성취한 민주주의가 더 이상 브라질 인구의 절반에게는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님을 의미하였다.

보우소나루 측에서 형성한 선거동맹은 신자유주의 경제 프로젝트(자유 시장 논리의 급진화)와 함께 소위 “도덕과 관습 의제”, 즉 이성애자들의 배타적 결혼개념,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여성, 흑인, 토착민의 평등권에 대한 투쟁을 전제하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 모델의 유지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소비문화를 전제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 문화적인 반면, 성경적으로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반근대적 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어떻게 이 둘 사이에 선거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서로 다른 두 그룹을 하나로 묶는 것은 현대 세계의 기본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거부투쟁이었다. 민주주의의 기둥 중 하나는 사회정치적 갈등은 권위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평화적 수단과 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하며 모든 시민은 투표를 통해 이 토론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개념이다. 다른 한편, 인권(성별, 피부색, 종교 때문에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을 시민권, 정치적 권리, 음식, 교육, 건강에 대한 접근권과 같은 사회적 권리를 포함하는 개념)에 대한 인정과 법적 보호는 사회의 하위 집단에게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사회적, 법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는 여성, 흑인, 토착민, 빈곤층, LGBTs, 이민자 및 기타 사람들이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이들에 대하여 국가는 경제적, 사회적 환경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장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을 해왔고 상당부분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이러한 과정에 대하여 신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강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기도 한다.

▲ 한국계 남미해방신학자들인 성정모 교수(사진 왼쪽)와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홍인식 제공

마치 권위주의, 가부장제, 남성주의(Machismo), 인종차별, 동성애혐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과 증오, 외국인혐오증(이민자에 대한 혐오증)이 트럼프를 비롯한 여러 다른 국가에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권위주위적인 정권을 탄생시켰듯이 2018년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 정권을 탄생시켰고 또한 이번 선거에서 선거동맹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 집단의 공통된 특징의 밑바닥에서 우리는 인류에 대한 비전을 '우등'와 '열등'으로 구분하고 분류하는 성향을 발견한다. 이 우열은 예를 들어, 기업에서 상사와 부하 사이의 업무 체계 내에서의 기능적인 면의 우월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의 측면에서의 우열을 의미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고, 백인은 비백인보다, 부자는 가난한 자보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인보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보다 우월하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이러한 우열의 기준에 대한 정당성은 종교 혹은 종교 수준의 담론에 의해서 유지되고 설명된다.

우리는 전통적 기독교 국가 혹은 기독교가 지배적인 국가에서 복음의 가치를 뒤집는 신학이 만들어지고 통용되고 있다는 현실을 목격한다. 즉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사탄적 유혹이라는 내용의 가르침이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인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는 신학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신약에서 바울은 하나님 보시기에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당시 이들 사회 집단을 차별하고 위계화하는 사회정치적 체계 안에서 살고 있었고 또한 그 체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비인간적 분류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존엄성과 기본권 면에서 평등하다고 여겨지는 세계관과 평등하고 동등한 인권이 없고, 모든 사람이 존엄성이 평등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존엄하게 살 권리가 없다고 믿는 세계관 사이의 갈등이다.

오늘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적 논쟁과 선거는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세계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룰라와 보다 민주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사회의 프로젝트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투쟁에서 우리는 정치와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두 가지 측면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번 선거를 위해 성경, 교회, 이단을 명시적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기독교 믿음(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거운동을 했고 보우소나루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지명했다. 정치와 교회 신앙의 이러한 관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더 넓은 의미의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고통과 세상의 불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번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주제는 민주주의, 인권, 모든 인간은 존엄성에 있어 평등하다는 신념과 같은 우리 문명의 근본적인 가치와 연관된 것이었다. 이제 또 다른 단계가 시작된다. 세계화된 금융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문제와 가장 부유한 1%와 가장 가난한 99%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 충돌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에서 넓은 의미에서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실천적인 방법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경우, 우리는 믿음과 정치에 대해 생각하고 대화하면서 오늘의 사회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효율적이고 충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성정모(브라질 해방신학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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