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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몸, 눈과 눈이 마주칠 때

기사승인 2022.10.06  00: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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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사람을 살리는가?(왕상 17:17-24; 행 3:1-10)

▲ Giovanni Lanfranco, 「Elijah Receiving Bread from the Widow of Zarephath」 (1621-1624) ⓒWikipedia

오늘의 본문들은 각각 기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적은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건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있으면 하고 기대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성서에는 기적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고, 특히 예수 사건들에서는 기적이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기적을 꼭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기적은 반향과 상관없이 그것이 지시하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기적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합니다. 그런데도 기적만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그것으로 얻는 현재의 이익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기적은 반복되지 않기에 현재의 관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더나아가 기적 이야기를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한낱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 이야기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기적 이야기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서 전체를 이끌고가는 목표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아합 시대에 극심한 가뭄을 예고한 탓에 요단 앞 그릿 시내에 숨어 살게 됩니다. 가뭄으로 시내조차 마르자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고 하나님은 그를 시돈 사르밧 지역의 한 과부에게 보내십니다. 그렇지만 그 이방 지역 역시 가뭄 피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뭄이 비록 아합에 대한 심판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그 피해는 자연과 약자들에게 더 크게 다가옴을 암시합니다. 이 때문에 자연을 이용한 심판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력을 드러낸다 해도 그 피해는 크고 그 효과는 작을 수 있습니다. 심판의 원인이었던 아합의 정치는 변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시돈 사르밧 과부에게도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그가 가뭄을 견디고 이겨내게 했습니다. 가뭄이 끝나기까지 통의 밀과 병의 기름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과부는 아들이 죽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과부가 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아들의 죽음을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일일까요? 그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가 좋은 일 뿐만 아니라 나쁜 일도 엘리야에게 돌리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생각나게 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원망하는 과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왜 하필이면 자신이 과부의 집에 있을 때 재앙을 내려 그의 아들을 죽게 했냐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가뭄 속에서도 자기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왔는데, 그 아들의 죽음으로 그는 최대의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훗날 그는 이세벨에게 쫓길 때도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엘리야 같은 대예언자도 위기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보통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건에서 다른 것이 엘리야에게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누구도 해본 적이 없을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차디찬 그 아이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기를 세번 반복하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제발 이 아이의 혼이 돌아오게 하소서! 죽음을 안은 엘리야의 절박한 호소에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생명을 돌려주십니다. 아이를 돌려받은 과부의 놀라움과 감격도 말할 수 없이 컸겠지만, 엘리야도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입니다.

과부의 고백대로 그는 이 사건에서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말에는 밀과 기름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살림이 과부의 그런 고백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행태에 주목해야 합니다. 죽은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맞추는 그 절절한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원망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그 아이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아이를 안게 했고, 이 마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러한 마음과 행동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불행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꼭 그와 같은 기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몸과 몸을 맞대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졌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건도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였습니다. 성전 문 옆에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거기에 앉아 구걸했습니다.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그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마치 처음 있는 일인양 기록되어 있으나 그들은 그동안 그를 보았는데도 무심코 지나쳐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날의 사건은 그 사람의 구걸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구걸에 베도로와 요한은 그를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서야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그가 처음 시야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구걸하는 걸인이었을까요?

베드로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눈과 눈이 만나고 눈과 눈이 맞춰집니다. 베드로는 그 눈에서 그의 가장 절실한 소원을 봅니다.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바랬을 물품이나 금전이 아닙니다. 온전한 몸, 걸을 수 있는 몸입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내적 요구에 응답합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를 지나쳐왔던 베드로일 수 있지만, 그를 부른 사람 앞에 선 베드로는 그를 사랑의 눈, 예수의 눈으로 보았고 그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얼굴로 얼굴을 똑바로 볼 때, 거기에는 연민이 싹트고 자비가 자라고 행동이 시작되고 ‘살림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사랑이 그 만남 속에서 자기를 드러냅니다. 공감과 연대의 길이 열리고 전환이 시작됩니다.

몸과 몸을 맞추고 눈과 눈을 마주치는 마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그 마음에 하늘이 감동하고 예수의 사랑이 일합니다. 

그 몸, 그 눈, 그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기를 빕니다.

그 안에서 ‘살림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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