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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약탈적 자본주의에 ‘아니오’라는 단호함으로

기사승인 2022.10.01  15: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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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정치와 짱개주의 ⑹

▲ 헝다그룹 파산으로 대표되는 중국식 자본주의의 종말 ⓒGetty Image

인정투쟁이 짱개주의를 무색하게 한다

중국은 앞서 언급한 두 비판이론의 접합을 요구한다. 공산당 독재가 아무리 유능하고 국가의 부를 살려내고 국민들의 삶에 개선을 가져온들, 오히려 이러한 개선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더 많은 인정투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자유의 진보를 말한다. 자유를 경험한 사람은 도둑질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중국은 크고 작은 혁명으로 점철된 나라다. 덩샤오핑 이후 저항운동들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통해 나타났다. 1989년 천안문사태, 노벨 수상자 류샤오보의 ‘08헌장’ 사건—거의 다 인권운동과 시민사회를 지키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2012년 시진평 등극 이후 인권의 질이 매우 나빠진 것은 유엔이나 국제 인권사회의 상식에 속하지만, 이것이 ‘내정간섭’이라는 중국 공산당의 넉두리와는 다르다. 자본주의화된 중국사회의 현실은—그것이 아무리 붉다고 해도—서구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토크빌처럼 태양왕 루이 14세가 되는 것이 무능한 루이 16세 보다 혁명을 피해가기가 쉽다. 그러나 루이 14세를 흉내내기엔 중국사회는 후기자본주의 체제 안에 잡혀있다.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향한 열망이 너무커서 다른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경제 사령관인 리커창 국무원 총리가 시진평의 코로나 봉쇄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다.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시진평 주석이 공동부유론을 내걸고 빈부격차를 줄인다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이미 40년 이상 시장경제에 깊숙히 들어온 중국사회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다.

헝다그룹을 비롯한  중국 대형 부동산업체들이 파산으로 몰린다. 부동산 업체에 땅을 대여해주고 그 댓가로 50% 예산수입을 충당한다. 도시로 유입되는 노동자들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수요는 급증한다. 국가의 경기 부양정책으로 인해 사업체는 엄청난 융자와 국유의 땅을 대여 받고 공사를 한다. 당연히 다른 영역에도 사업을 확장한다. 부채가 눈덩이처럼 늘어갈 수밖에 없다. 아파트 공사가 부채로 인해 중단되기도 하고, 폭파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아파트를 비싸게 팔기 위해 입주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유령 도시도 된다.

심한 경우, 부동산 업체는 더 큰 땅을 정부로부터 대여받고, 천문학적인 융자를 받지만, 공사는 안하고 새 아파트 공사를 확장한다. 아파트를 미리 구입한 입주자들은 공사중단으로 인해 투자금액을 돌려 받지 못한다. 붉은 자본주의는 관료제,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막대한 부채로 흔들리며, 아파트 폭파로 나타난다. 자본이 공공선을 위해 재조직 되어야 한다면, 이에 접합되는 인민의 참여를 자발적으로 끌어내는 사회기구와 공공교육, 자율적 연합체들은 필수에 속한다. 공공선의 실현은 사회적 조건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문화적 과정과 공동부유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습관’에 달려 있다.

정치와 경제 사이에는 사회적인 영역이 있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문화, 정신적 특질 즉 사회화된 “마음의 습관”이며, 이것이 인민의 유기적 연대감을 묶어주고 공동부유론의 토대가 된다. 강력한 중앙집권과 관료행정제에 의한 체제순응과 심리적 메커니즘은 결국 인민을 자본의 축척논리에 먹히게 한다.

자본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며, 이에 대한 문화, 도덕적 태도가 공공선을 위해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위로부터 국가의 지배를 통해 인민으로부터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정치방식에는 강한 국가(리비아단)와 무능한 인민사회의 관계가 나타난다. 이런 구조에서 공동부유론을 추구하는 것은 이미 토크빌이 염려한 위기로 내몰릴 수가 있다. 나는 왜 “중국정치와 짱깨주의”를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말하는가? 중국 비판이나 미국 옹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비판적 민주주의 전통 역시 미국은 이제 시민운동을 통해 시작하는 정도다. 붉은 중국이 인민민주 독재에 근거된다면, 독재개념을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전통에서 이해하고, 자발적 인민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시민문화가 필요하다.

교회는 인정정치로

중국을 비판적으로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왕서방이 되려는 모방욕구는 바람직 하지 않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이념과 가치를 ‘정치적으로’ 즉 정당을 통해서 시도해왔다. 그러나 공공선에 부합한 사회문화 또는 도덕적 조건들과 자발적 기구들을 이끌어내는 데 여전히 부족하다. 결국 구태한 습속의 현상에 빠져 진영논리에 쉽게 갖혀 버린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부른 습속(Habitus)의 현상학은 ‘내로남불’이라는 사자성어로 나타나 사람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블랙 코미디는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바이던과 같은 중국보다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시민사회에 기초한 자율적인 기구들과 협의체 그리고 민주주의의 비판적 가치와 합리적 태도를 공론장에서 확대시키는 일은 사회를 저급한 진영논리가 아니라 유기적 연대감으로 묶어 낸다.

하워드 진의 유명한 저서 “미국의 민중사”는 미국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가장 리얼하게 폭로한다. 인디언 학살, 흑인노예, 제국의 확장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청교도적 이데올로기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교회는 새겨 들어야한다. 종교는 시민사회의 도덕성을 함양 해준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권을 진보의 문명으로 찬양했다. 종교는 사유 재산권 취득을 위한 거치른 개인주의를 정당화해주고, 거리낌 없는 야만과 침략과 제국주의를 하나님의 섭리인양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축복해 주었다. 제국의 팽창을 지지하는 사회 진화론과 자유방임이 약탈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고, 미국 정치는 천박한 전제주의와 선동으로 물들어졌다.

굳이 막스 베버의 생각을 빌리지 않아도, 비판적 민주주의가 사라질 때, 카리스마적인 전제주의와 관료제 그리고 민족주의 결합은 파시즘으로 내몰린다. 이것을 미국의 정치에서 트럼프 정부에서 본다. 왜 대한민국에는 트럼프주의자들이 많지? 청교도 신화로부터 작별을 할 때가 되었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정정치가 중요하다. 이민자들의 문화, 인종문제, 섹슈 얼리티, 젠더 등이 포스토콜로니얼 조건을 형성한다.

1세계 안에 3세계가, 3세계 안에 1세계가 혼재하는 후기 자본주의안에 침투, 예속, 분할, 배제의 논리가 여전히 사회를 잠식하고, 계층화한다. 이것을 넘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인정정치로부터 시작된다.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사회화된 ‘마음의 습관’이 공공선을 이루는 새로운 대안이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짱개주의나 전제적 모방욕구를 너머서서 생활세계를 회복하게 한다.

여기에 한국의 종교, 특히 개신교는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교회는 약탈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종교 파시즘에 “아니오”라고 대답해야한다. 붉은 자본주의와 군주지배에 환상을 가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교회는 시민사회와 비판적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정의와 인정정치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오는 시대의 징조로 분별해야 하지 않을까?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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