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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사람, 도로테아 에르드무테

기사승인 2022.09.30  16: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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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른후트에서 온 편지 (14)

▲ 헤른후트 공동체의 공동 설립자이자 진젠도르프 백작의 아내였던 도로테아 에르드무테 ⓒ홍명희

진젠도르프의 업적과 공로의 큰 지지를 해 준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이던 ‘도로테아 에르드무테’였다. 같은 나이의 백작 가문의 그녀는 진젠도르프가 가진 뜻을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을 만큼 믿음의 소유자인 것을 진젠도르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부부됨은 투쟁의 부부라고 불리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목표로하는 투쟁을 위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신부의 반지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가 새겨졌고, 신랑의 반지에는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써 넣었다. 그리고 신부의 머리에 많은 장식을 하는데, 그것도 포기했을 만큼 신부 에르드무테는 검소한 하나님 앞에서의 예식을 원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왜 우리 나라의 항일 독립투사를 생각하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은 두번째 치고, 함께 일본을 대항할 독립 운동을 할 수 있기 위해 뭉친 사람들 같다. 다만 대상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갖 방해하는 세력들을 헤쳐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과 선교에 열심이었던 이들 부부의 삶은 마치 독립투사 만큼 결연하기 때문이었다.

진젠도르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 길었다. 그러나 헤른후트에 설립된 공동체를 잘 돌보고 있던 에르드무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설립자이며 동시에 영적인 지주였던 진젠도르프가 없던 시기에도 주님을 강하게 신뢰하기에, 이들 공동체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전적인 공동체의 재정을 혼자서 관리하는 큰 부담을 감당해 내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성경말씀을 신뢰하지만, 어떤 교회 공동체나 재정적 문제에 봉착했을 때, 아내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했으며, 심지어 어떤 다른 의견이 있으면 절대로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밀고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나의 아내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며 지도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 세상에서는 이러한 진젠도르프의 여성해방적인 입장을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부부는 서로 서로가 돕고, 서로 복종하는 입장을 고수한 남편 덕에 에르드무테는 충분히 자신이 가진 달란트로 교회 공동체와 또한 반이상의 모라비안 사람들과 마을 전체를 돌보는 데에 충분한 기치를 발휘하게 되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여전도회(Frauenamt)가 결성이 되었고, 새로 들어오는 여자 아이들이 읽고 쓸 수 있게 가르치고 성경과 찬송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진젠도르프가 죽었던 해인 1758년에는 14명의 여자 장로와 여목사 안수를 주었으니, 이는 독일 루터 교회보다 200년 이상을 앞서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그당시에 여성을 가정과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 주는 큰 사건이었으며, 또한 여성이 가진 모든 특별한 은사와 능력을 공동체를 세워가는 데 공헌되게 하는 것이었다.

얼마전에 1722년 9월 7일에 그들의 300주년 결혼 기념일이 되었다. 목사님은 부부들을 저녁에 초청하여 특별한 결혼 축복예배를 드렸다. 예복으로 갈아입고 남편과 나아갔다. 강단은 붉은 색과 하얀 레이스로 특별하게 장식되었고, 성만찬 상이 준비되었고, 목사님 부부와 준비위원들은 하얀 예복을 갖추고 있었다. 보통 50주년을 다이아몬드 결혼식이라 부른다. 목사님은 300주년에는 걸맞는 보석을 찾을 수 없다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몇몇 부부들이 다 예의를 갖추어 함께 한 이 날의 성만찬은 더욱이 내게 은혜있게 다가왔다. 더욱이 중간 중간 무릎을 꿇으며 기도 할  때, 더 없이 감사와 감격이 몰려왔다. 철없던 스물 다섯에 결혼하여 지나온 남편과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모든 것이 감사였다. 나는 의지가 그렇게 굳지 못한 게 흠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을 돌보면서 의지가 강해져 갔고, 10년이 넘게 투병중인 남편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내 자신이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 아니던가. 주님의 돌보심을 경험했을 모든 부부마다 깊은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예배보다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 되었다. 안타깝게도 결국은 이혼을 하고 마는 교우들도 있었다. 그래도 교회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헤른후트에는 결혼을 안하고, 혼자 사는 여성분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주님을 남편삼아 사시니, 늘 감사가 넘치신다.

▲ 에르드무테를 기념하는 식탁 ⓒ홍명희

에르드무테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녀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결혼하자마자, 그녀가 신혼집으로 아랫마을 베르텔스 도르프 성에 살게 되었을 때, 모라비안이었던 크리스티안 다윗이 자기들 고향에 있는 카톨릭의 박해로 있던 사람들을 데려와도 되겠냐고 물어왔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두사람은 당연하게 맞아들였다. 신혼의 단꿈도 잠시였을 것이다.

왕궁을 드나들며, 왕의 일을 받들던 남편이 모든 재정을 든든히 했을 때는 큰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라비안들을 받아들여서 공동체를 시작하면서 부터 왕을 섬기던 것을 그만 둘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로서 그들의 삶은 모험적이 되었다.

거기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유행병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믿음이 좋았던 에르드무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12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8명의 아이들을 잃을 때마다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단지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남편의 공석시에는 백작의 권위로서 마을 전체의 일도 다스려야 할 것도 많았고, 헤른후트가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찾아 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그녀의 식탁에는 늘 30명 이상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손님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털어놓았고, 에르드무테는 인내로서 그 자리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보면 결국 좋은 땅에 뿌려졌던 씨앗도 견뎌내서 마침내 열매를 맺는 다는 말씀이 있다. 견뎌 내는 것. 그것을 그녀는 장하게 해 내었다. 나는 가끔 힘들 때마다,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얼마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미소를 띄우고 있는 모습에서 위로받곤 한다. 모나리자 보다 더 아름답다기 보다는, 고통을 통과하며 예수님을 마음에 품는  강인한 인내에서 나오는 미소이기 때문에 더 울림이 크다.

그녀가 다음의 시를 지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님, 당신이 이끄시는 대로 우리는 당신 손에 위로삼아 나아갑니다.
우리는 당신의 위로를 알고, 또한 느낍니다.
만약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면, 또한 짊어 질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험난한 삶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위로가 필요했던 도로테아는 철저히 주님이 주시는 위로에 의지 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 보다도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온 힘을 다해 헌신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헌신은 교회 공동체의 예식가운데, 세족식을 참으로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백작의 신분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코 자신만이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모두가 같은 자매로서의 옷을 입었을 뿐 아니라, 가장 낮은 발을 서로 씻기는 예식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겸손하였는지 볼 수 있다. 그 겸손은 물론 우리 주님에게서 배운 것이기에 귀하다.

그 당시 교회는 에르드무테를 잃어야하는 슬픔을 감당해야 했다. 그녀은 헤른후트 공동체의 여성의 상담자이자, 지도자이며 함께 어려운 시간들을 믿음으로 견디어 낸 본 보기였다.  진젠도르프도 1년간이나 두문 불출, 무척 그녀의 빈자리를 가슴 아파했다한다. 교회의 모든 여성들을 돌보며, 삶의 모범으로 이끌었던 그 자리에, 평생 두사람의 그림자처럼 함께 교회 일을 감당해 온 폴란드 농부 출신의 안나 니취만이 오르게 된다. 교회는 여성지도자가 간절히 필요했고, 진젠도르프는 마지막 삶을 그녀와 다시 결혼함으로서 이어가려 했지만, 결국 부인을 따라 60평생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사랑이라는 것 보다 신뢰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신뢰가 지속되어야 사랑도 지속되겠지만, 서로가 가진 최선의 것을 바쳐서 끝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부부는 하나이기에, 진젠도르프 한 사람만이 이룬 업적이 결코 될 수 없고, 그들이 처음 결성한 투쟁적 부부는 결국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얼마전 니카라구아에서 헤른후트 교회를 하는 현지 목사님 부부가 오셨다. 함께 예배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이곳, 본 교회를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젠도르프 선교의 결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가장 최우선에 두었기에 그녀의 삶은 헌신의 삶이었지만 계속해서 성장했다. 섬김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견뎌내야하는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얼굴에 새겨지는 깊은 미소를 가지게 되며,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홍명희 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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