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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이를 때에

기사승인 2022.09.27  23: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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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갈라디아서 6:1~10)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친서 가운데 하나로서, 데살로니가전서에 이은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 연대는 대략 54~55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갈라디아는 소아시아의 중부지역, 곧 오늘날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가 있는 중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지역을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하고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사도 16:6; 18:23).

갈라디아서는 마치 ‘날선 검’과 같은 것으로 비유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논조와 내용으로 보아,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의 영향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처하는 서신으로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종교적 규율, 곧 율법의 준수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는 사태에 대해 경고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역설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율법에 매여 선민의 특권의식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 어떤 특권도 배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선포하는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요체입니다. 이 말씀은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권리를 선포하는 인권선언으로서 의의를 지닌 동시에 그 누구든 환대하고 존중하는 교회의 이상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입장에 따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진정한 자유에 대해 역설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를 가능케 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사실상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말씀은 그 구체적 삶의 방식에 관한 교훈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에서 진정으로 자유를 가능케 하는 삶은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그 삶은 성령의 열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가 그 열매입니다(5:22~23). 본문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각 개인의 마음 바탕,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이뤄지는 구체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윤리적 교훈을 제시하는 본문말씀은 언뜻 보기에 그저 좋은 말씀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사도 바울이 당대의 보편적인 윤리와 어떻게 공감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윤리로 수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흔히 사도 바울의 사상을 연상할 때 그리스도인만의 특유한 신학적 관심사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당대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와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규범을 사도 바울은 깊이 숙고하고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실제 삶의 본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 가장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가 소통의 능력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소통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1~6)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은 갈라디아 공동체가 율법을 따르는 길에 빠져 든 정황을 말합니다. 여기서 죄는 근원적인 한계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법을 어긴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을 문제시하기보다는 그를 다루는 사람의 태도를 오히려 문제시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법의 집행자로서 자신이 진리를 대변한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법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법에 매인 사람들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집행자는 그 한계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권면은 한마디로 자기성찰을 강조한 것입니다. 델피의 신전에 기록된 유명한 경구이자 소크라테스에 의해 강조된 “너 자신을 알라.” 하는 격언과 통하는 권면입니다.

바울은 범죄자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독선적인 태도가 범죄행위보다 더 큰 손상을 공동체에 입힐 가능성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잘못은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지만, 마음의 독선은 도무지 바로잡기 어려울 뿐 아니라 모르는 가운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사회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태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는 권면 역시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하여 널리 유포된 격언입니다. “사람은 친구들이 진 짐을 나누어 져야 한다.”(소크라테스). 여기서 짐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실수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짐이 되었을 때 그것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료의 실수를 자신의 실수와 같이 여기며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 표현은 바울에게서 단 한번 사용된 것으로, 율법의 성취로서 사랑을 말했던 것(5:14)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뭔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경계한 것 역시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과 뜻을 같이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기가 뭔가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라는 격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형태로 변형된 격언을 계속 되풀이함으로써 바울은 일관되게 자기성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짐을 지라는 이야기는 자신을 알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을 분명히 알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격언이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라는 격언과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몫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남의 짐을 져 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지난 9월20일부터 22일까지 경주에서 개최된 제107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여러 면에서 퇴행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에큐메니안

그래서 이어지는 격언은 다시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격언 역시 그리스 철학자들의 전통에서 스승과 학생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정신을 환기할 뿐 아니라, 심지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구절 곧 “나에게 이 기술을 가르쳐 주신 자를 나의 부모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나의 삶을 그와 협력하여 사는 것,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한다면 그에게 나의 몫을 주는 것...”이라는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씀을 매개로 그 나눔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안의 가르치는 사람들의 몫을 나타냅니다. 배우는 사람들이 그들과 협력하여 공동체를 완성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같은 뜻을 지닌 격언을 누차 반복한 바울은 마지막으로 역시 동일한 뜻을 지닌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격언으로 정리하며 이를 종말론적 희망으로 연결시킵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7~10)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격언에 이어 하나님은 조롱을 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자기를 속일지언정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을 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종말론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이 바라는 것을 따라 심는 사람은 썩을 것을 거두고 영이 바라는 것을 따라 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거두리라고 합니다.

통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바울은 자기 책임의 문제를 등한시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5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스스로의 선택의 차원과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인지 깨닫고 선택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극명한 대비에 이어 긍정적인 언어로 위로와 희망을 선포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이며, 지쳐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선포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보편적인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데 낙심하고 지쳐 넘어져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5:22~28)를 누리듯 그 소중한 사랑의 삶은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 권면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삶의 길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결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선한 일을 행할 것을 확인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믿음의 식구가 강조되고 있지만, 그것은 배타적 경계를 강조하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그 선한 일이 선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보편적 사랑의 윤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출발점을 말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충실성을 배제하고 추상적인 박애를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서 세상에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초기 교회는 그렇게 세상을 구원의 길로 향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보편적 사랑의 윤리를 가르치는 정신이 과연 오늘 교회 안에 살아 있을까요? 신앙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며 자기만의 의에 근거한 배타적 성채를 세우는 데 몰입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소통능력을 상실하여 보편적 인권에 무심한지 오래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향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주 수요일(9.21.) 경주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장로회 제107회 총회를 다녀오고 나서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지난해까지 교회와사회위원장을 맡은 4년 동안 늘 공격의 표적이 되어 시달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장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결의들이 이뤄져 안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성소수자목회연구위원장으로 그저 보고의 임무를 띠고 하루 다녀왔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웠습니다. 기후정의위원회 구성 안도, 성소수자목회연구위원회 존속 안도 기각되었습니다. 광주항쟁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하는 사업도 논란거리가 되었고, 전반적으로 뒷걸음치는 논란과 결의들이 이어졌습니다. 내년이면 ‘새 역사 70주년’을 맞이한다고 떠들고 있지만, 그 구호가 무색해지는 참담한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기장교회 역시 퇴행적인 한국교회 흐름에서 전혀 비켜 서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와중에 오늘 본문말씀을 마주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의 복음, 그 놀라운 보편적 사랑의 삶에 기초하여 튼튼히 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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