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비판적 민주주의를 향해

기사승인 2022.09.24  16:48:49

공유
default_news_ad1

- 중국정치와 짱개주의 ⑸

▲ 민중을 한없이 생각했던 로베스피에르 ⓒGetty Image

루소는 로베스피에르의 멘토인가?

루소의 평등한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에 기초한 일반의지는 사회계약을 통해 국민주권이 표현되는 입법에 의해 행사된다. 일반의지가 권력을 견제하는 삼권분립(로크와 몽테스키외)에 비해 우선권을 갖는다. 그러나 1793년 공안위원회의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일반의지 개념은 반-민주주의적으로 채색되고, 권력을 쥔 정치 엘리트들의 독재와 공포정치로 남용되었다. 평화시기에 국민정부에 대한 호소는 덕이지만, 혁명의 시기에 그것은 덕과 공포가 된다. 공포는 덕으로부터 나오는 신속하고도 유연성이 없는 엄격한 정의를 의미한다. 심지어 몽테스키외의 민주 공화제의 덕은 공포를 유출하는 근거로 남용된다.

변호사 출신 로베스피에르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자본주의에 기초되어 있고, 봉건제와 군주제로부터 해방된 대중과 노예들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광범위한 사회계층으로 분화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들이 국가 관료제에 의해 부르주아 이익과 권력관계로 포섭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국가의 억압적인 기제들(관료제, 경찰, 군대)과 더불어 금융의 지배권은 심지어 파리 코뮌에서도 장악하지 못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스꽝스러운 이성의 지고신에 대한 숭배를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의 지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과연 루소가 그린 시민종교를 말하는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자코뱅은 레닌과 스탈린에게 어필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그는 무자비한 테러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낯선 혁명가 정도로 비추어진다. 혁명은 혁명의 자녀들을 잡아먹는다. 러시아에서 혁명은 혁명가들의 환멸의 역사였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혁명과 개혁은 머나먼 길을 같이 간다. 비판적인 민주주의자로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문제 틀을 항상 정치투쟁에서 고려했다. 아일랜드 문제에서 오히려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들에 대한 영국노동자들의 인종차별과 노동귀족의 모습에 날선 비판을 했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했다.

비판적인 민주주의자로서 마르크스는 보편-구체적 변증법에서 ‘너’와 ‘내’가 ‘우리’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사회적 연합과 연대를 통해 필연의 왕국을 바라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대논리학”에 나오는 헤겔의 변증법의 충실한 제자로 남는다. 그의 계급투쟁은 모든 것을 대립과 갈등으로 나누어 도덕도, 시민사회도, 예술도, 종교도 계급투쟁과 독재로 환원시키는 진영주의자와는 다르다. 심지어 그는 “자본” 3권에서 그가 그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 연대는 세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고 말을 할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토피안이 아니라 리얼리스트다.

48혁명에서 마르크스와 토크빌은 만난다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머나먼 길에서 마르크스는 사회구성을 역사 발생론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한 물질적 이익과 권력권계의 그물망을 통해 분석한다. 저항, 반동, 그리고 잔인한 진압과 부메랑이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나타난다. 사건과 구조들의 상관관계가 그의 역사 변증법안에 들어와 있다. 이 지점이 그를 알렉시스 토크빌의 혁명의 구조이론과 만나게 한다. 적어도 “유대인 문제”에서 마르크스는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문제를 헤겔의 국가론과 토크빌을 매개하는 시도에서 암시하기도 한다. 토크빌은 헤겔의 시민사회를 수용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인정정치는 이후 사회주의 역사에서 실종되고, 일당독재와 개인숭배가 인종 내지 민족 군주제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역사의 전개과정에는 파열과 단절 그리고 반동이 있다. 심하면 블랙코메디로 전락해 실소를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내재적 비판이 요구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문제틀(problematique)을 통해 현재사를 다시 쓰게 한다.

어쨌든 로베스피에르와는 달리,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정치이론은 알렉시스 토크빌에 의해 전개된다. 토크빌은 루이 필립의 7월 군주정부에서 정치경력을 시작하고, 1848년 2월 혁명 이후 제 2공화국에서 제헌의회 회원으로 헌법초안에 관여했다. 그러나 1851년 12월 루이 보나빠르트의 정치 쇼 같은 쿠데타에 저항하고 구속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성을 옹호했다. 1831년 그는 7월 군주정부의 미션으로 사회교정 시스템과 감옥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여행을 했다. 1835년 그는 “미국에서의 민주주의”를 출간하고 여기서 민주주의 혁명은 산업화의 귀결로 파악한다. 역사는 사회 경제적 발전에 의해 조건 되고 변화 한다는 마르크스의 견해에 동감한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전적인 저작을 낸 토크빌이 마르크스 저작을 알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13살이나 어린 마르크스의 저작을 프랑스의 정치사회학자가 후진적인 프로이센의 난해한 변증법 철학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인식론의 틀을 통해 사회구조가 혁명을 만들어내고,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다는 입장에서 서로 조우한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원자화된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적 사실들 즉 의회정부, 보통선거, 비정치적 자유로운 결사체, 지역 꼬민의 합의를 통해 접근한다. 이 지점에서 비판적 민주주의는 미국의 건국이념과도 매우 다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의미한다. 사적 이익이 공공선으로 나가는 길은 국가 중심의 행정관료제로부터 독립된 시민사회의 다양한 자발적인 결사체와 문화기구들을 통해서 이다. 이러한 사회학의 집단 원리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식민주의 대변담론인 자유방임 개인주의(존 스튜어트 밀)나 사회진화론(허버트 스펜서)과는 전혀 궤를 달리한다. 방법적 집단 원리를 사회학에서 꽃을 피운 사람은 단연코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다. 그의 노동 분업에 대한 사회학은 우파인 아담 스미스와 좌파인 마르크스 사이에서 나오는 유혹의 사이렌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들을 넘어 시민사회의 합리성과 유기적 도덕의 접합으로 나간다. 진영논리나 이항의 대립이 아니라, 대립을 해소하는 통합적인 사회기구가 부각된다. 뒤르켐은 프랑스가 국가와 시민의 삶을 매개해주는 자발적인 결사체들이나, 또는 도덕 적인 전문 위원회와 같은 협의기구가 없어 혁명에 도달한 것으로 안다. 토크빌-뒤르켐의 전통은 헤겔 마르크스의 변증과는 다르지만, 선택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