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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총회, 차이를 차이로 드러내는 차이의 잔치

기사승인 2022.09.08  08: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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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차 독일 칼스루에 WCC 총회에서 WCC를 생각한다

▲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정교회 사제들이 눈에 띈 WCC 총회였다. ⓒ이정훈

지금 이 칼럼은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 쓰려고 마음먹었던 글이다. 나의 무지이기도 하거니와 널리 퍼져 있는 오해에 대해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시도로 기록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바로 WCC에 대해 오해 혹은 이해에 대해서 말이다.

개인적인 고백을 먼저 하자면 이번 WCC 총회 보다 나에게 있어 더 큰 관심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지시 하에 이루어진 나치의 장애인 학살 작전이었던 ‘Aktion T4’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WCC 총회는 내 머릿속에 있지 않았고 학살 현장을 다녀온 후 그저 설겅설겅 구경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이런 나의 계획이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사건으로 일거에 무너지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WCC 총회에 집중할 수 있다.

다양성과 차이를 만나다

그렇게 시작된 WCC 총회와 기간 동안 WCC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점을 어쩔 수 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서로 다른 피부색과 언어, 다양한 종파들에 소속된 성직자들과 평교우들을 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강도의 여파가 몰려들었다.

특히 검은 사제복을 착용한 여러 갈래의 정교회 사제들은 눈이 띌 수밖에 없었기에 유난스레 바라보기도 했다. 검은 사제복은 동일했지만 머리에 쓴 다양한 모자들은 서로 다른 정교회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피부색이나 언어도 많이 달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에 독일 현지 시각으로 9월 7일 아침, 아직 남아 있는 유럽 여정을 위해, 숙소에서 대략 2km 떨어진, 우리말로는 빨래방이라고 하는, ‘wash salon’을 방문했을 때 우연치 않게 중국 본토에서 WCC 총회에 참석한 중국 기독교인을 만나게 되었다. 빨래방에 들어와 난감해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짧은 영어로 가르쳐 이용 방법을 알려 주었더니 자신을 “I’m China”라고 소개할 때 귀를 의심했었다. 그 소개를 듣자마자 순간 나도 모르게 “Are you from Chinese Taipei?”라고 히는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을 할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렇게 짧은 영어로 몇 마디 나누고 헤어지면서 중국에서 온 기독교인은 “Today at 5, there is a workshop that we host. You‘re reporter. Can you join our workshop? It would be thank to cover and write.”라며 빨래방을 나섰다. 여전히 얼떨떨했던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목례만 하고 말았다. 돌아서 가는 중국 기독교인을 내 빨래가 다 되었음에도 정리할 생각도 않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중국 기독교인과 헤어지고 난 후 WCC 총회 장소로 달려가 WCC 총회측 인사를 만났다. 중국 기독교의 총회 참석에 대한 경위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대만 기독교인들이 중국 정부의 ‘One Chinese Policy’에 대한 내용으로 워크샵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WCC 총회가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때만 해도 중국 기독교는 WCC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WCC 총회측에 전달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만 기독교에서 앞서 언급한 주제로 워크샵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기독교측에서 WCC 총회 며칠을 앞두고 WCC 총회측에 연락해 대의원 10명과 함께 중국 기독교인들이 WCC 총회에 참석할 것이며 중국 정부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워크샵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WCC 총회측에서도 많이 놀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WCC 총회 참석을 불허하거나 워크샵 진행을 못하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에 중국 기독교측의 요구대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두 계기, 즉 다양한 국가 소속의 정교회에 중국 기독교측과 대만 기독교측의 동일한 주제에 대한 상반된 워크샵 소식은 총회 기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WCC의 정체성과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WCC 총회가 시작되기 전 한국 신학자와 WCC 총회의 한계에 대해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복기하도록 했다. 더불어 WCC 총회측 인사가 강조했던 WCC 총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총회 기간 동안 내가 WCC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결론이 그제야 꿰어 맞춰졌다. 많은 이들이 WCC 총회의 한계를 지적하며 하는 언급들은 ‘아무런 합의도 끌어내지 못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하지도 못하고, 행동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이는 나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지만 이번 총회 기간 동안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 독일 빨래방에서 만난 중국 기독교인은 존재 자체로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정훈

차이를 차이로 남겨두는 용기

WCC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지만 그 과정의 결과는 ‘차이’(Unterschied)다. WCC 총회는 그 차이들의 잔치이다. 이는 분열과는 다르다. 이미 분열되어 있는 교회들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서로 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WCC 총회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뜻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있겠다. 벌써 몇 달을 지속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는 전쟁 자체에 대한 분명한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중국 기독교와 대만 기독교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뿐인가, 이 외에도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도 공론의 장에 올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극과 극이 WCC 내에 상존하고 있다.

교회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고 세계 교회들이 함께 행동한다면 분명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 못하기에 어떤 문제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WCC의 한계에 대해 실망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말할 필요 없이 분명한 약점이다.

이러한 실망과 비판에는 한 가지 함정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거룩하고 일치되고 보편적인 교회를 이룩한다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를 막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다양성을 폐기하고 포기하며 하나의 목소리를 위해 또 다른 목소리는 제거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된다. 이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는 각자의 판단 몫으로 남겨두어야겠다. 일치되어 하나의 길로 가자고 하는 것이 정말로 합당하냐는 뜻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협의회’는 결코 그렇게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다양성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폭력의 주체가 되어간다. 그간 WCC가 일치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급박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급박함은 사라졌기도 하거니와 혹은 여전히 존재함에도 더 이상 사람들은 폭력적 일치에 동의할 수 없는 주체가 되었고 시대가 되었다. 시대는 일치보다는 다양성과 차이가 중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와 다양성을 우리 모두는 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제3자에 해당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전쟁 반대에 대한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 옳게 보이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러시아 정교회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고 왜 그런 지에 대해 그들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는 작업에서부터 우리는 연합과 일치는 시작되는 것이다. 차이를 차이로 남겨두어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 세계교회는 한 번도 일치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이른바 착시현상이었다. 이제 이 착각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차이를 차이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 차이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말이다.

정의(Gerechtighkeit)는 차이를 비판할 수 있는 날선 검이다. 차이의 한쪽을 옳다하고 또 한쪽을 그르다 할 수 있는 무기이다. 어쩌면 나의 정의, 합의되지 않는 정의일 때가 훨씬 많다. 그렇기에 누구의 정의이냐고 물을 때가 이미 지났다. 누구의 정의에 따라 차이를 비판하느냐고 질문해야 될 때이다. 왜 그런 정의를 만들어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 그래서 그 정의 차체를 검증할 시기임을 인정해야 한다.

총회 폐막을 앞둔 새벽에 이번 총회를 경험하며 WCC 총회에 대해 정리하게 되는 것은 WCC 총회는 차이의 잔치라는 점이다.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고 검증 받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차이를 드러내고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Council의 합당한 모습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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