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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 의해 확장된 선교

기사승인 2022.09.05  23: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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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 ⑴

▲ 서구 선교사에 의한 선교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GETTY IMAGES
이 글은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2006년 10월 17일에 행한 강연이다. - 저자 주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는 성령의 역사일까?
‘선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라는 강연 주제는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추동된 선교의 역사를 진리와 자유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서구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 자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든지. 오늘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교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던 선교사들의 인간적 실수와 결함, 혹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태도와 억압의 역사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 안에서 함께 활동했던 성령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강연 주제와 관련하여, 16세기 유럽의 선교를 성령의 역사로 볼 것인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로 볼 것인지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16세기 선교에는 분명히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는, 아니 오히려 악령의 역사로 볼 수 있을 만큼 잔혹한 파괴와 살육의 역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억압과 고난의 선교의 역사 속에서도 해방과 치유의 성령의 사역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선교의 역사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찾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함께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의 역사, 곧 16세기 새로운 항로의 개발과 함께 시작된 서구 유럽의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선교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선교의 역사는 성령에 의한 복음의 확장사인가, 아니면 인종말살, 노예, 서구우월주의와 결합된 그리스도교 범죄사인가? 하나님은 서구 선교사보다 먼저 오셨는가 아니면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오셨는가? 선교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로 해석될 수 있을까? 

16-18세기 가톨릭 선교
16세기 선교는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과 그와 결합한 유럽의 식민지 역사의 규정을 받는다. 1453년 동방교회의 영적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슬람의 위협에 직면한 유럽은 눈을 새로운 대륙에 돌리기 시작했다.

1500년에서 1750년까지 그리스도교의 지리적인 확장의 주요 세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째,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발흥, 둘째, 가톨릭 종교개혁이 가져온 세계에 대한 탐험과 정보, 통상, 로마 가톨릭 세력의 정착, 셋째, 수도원 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에 대한 전통과 도구들이 마련된 것 등이다.(1)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후원 하에 선교가 진행되었다. 계약을 통해 교황은 국왕에게 정복권(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한)을 주었고, 그 반대급부로 국왕은 무역독점과 통치권 수행권리를 보장받았다. 국왕은 복음의 확대와 회개를 지원하였다.

교회와 국가권력, 종교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의 유착이 선교에 부담을 주었고, 이것은 정교분리의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교회는 1622년 포교성성(Propaganda Fide)을 설립하여 이 일을 추진하였으나 선교의 정치화를 방해할 수 없었다. 포교성성은 선교의 영적, 종교적 목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원주민 교인 가운데 성직자를 길러내려고 하였다.

또한 현지 문화에의 순응(Accomodation), 해외 교구의 확대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교구의 확대가 정치적 문제로 등장하자 로마는 지역교구에 자율권을 주지 않고 로마의 분당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교회 자체 안에서도 식민지적 상황이 대두되었다.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결정이 선교현장이 아니라 로마에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가톨릭 종단위주의 선교방식은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장점은 왕권의 보호, 재정적 후원, 종단들 사이의 경쟁적 활동을, 단점으로는 종단들의 세속적 관심사 및 무역관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선교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인 예수회의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 창설자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von Loyola, 1491-1556)는 16세기 로마 가톨릭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2) 그의 동료였던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는 인도, 말라카, 동인도 제도, 일본에 복음을 전하고, 중국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비에르가 실현하지 못한 중국 선교는 1581년 예수회 소속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예수회 선교사역의 주요 인물은 로베르토 노빌리(Roberto de Nobili)이고, 라틴 아메리카 사역의 대표적 인물은 바로톨로메 라스 카자스(B. Las Casas, 1474-1566)였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18세기까지는 가톨릭 선교의 몰락기라고 할 수 있다. 175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영향은 가톨릭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에 대한 축출로 이어졌다.

1750년과 1814년 사이에 나폴레옹 군대의 유럽 점령으로 신세계에서 그들의 지배는 끝났고 더불어 선교도 약화되었다. 1759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에서 추방되었고, 1767년에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같은 압력을 받았다. 1773년 교황은 마침내 예수회를 해체시켰다. 선교의 중심은 그 후 개신교로 넘어오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선교
프로테스탄트의 근대적 선교의 시작은 30년 전쟁이 지난 후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Pietismus)운동의 결과이다. 경건주의의 시조는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이다. 경건주의 신학의 요점은 전도의 열정이 없는 한 선교의 비전이 있을 수 없고, 개인적 경건생활 없는 한 전도의 열정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회심의 체험이 없는 한 개인적 경건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은 1694년 할레에 대학을 설립하였고, 슈페너가 사망한 후, 아우구스트 푸랑케(August Franke, 1663-1727)의 영향 아래 할레는 주변의 빈민학교, 고아원 기숙학교 등이 있는 경건주의 교육센터가 되어 갔고, 18세기에는 선교사업본부가 되었다. 이 할레 대학에서 최초의 개신교 선교기구로 설립된 것이 덴마크 할레 선교회이다. 인력과 자원이 할레에서 공급되었고, 그 초기의 발전이 덴마크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덴마크 할레 선교회란 명칭이 붙었다.

경건주의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로는 동인도에서 활동한 바르톨로메 치겐발크(Bartholomew Zigenbalg)와 하인리히 플루차우(Heinrich Plutschau) 등이다. 같은 경건주의 배경을 가졌으나 후에 모라비안(Moravian) 교회 감독이 된 친첸도르프(Nicolaus Ludwig Zinzendorf, 1700-1760)는 푸랑케와 더불어 18세기의 가장 훌륭한 선교지도자로 손꼽힌다. 모라비안 교회의 첫 선교는 1732년 버진 열도의 덴마크령인 성 토마스 섬에 있는 흑인노예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후 1760년까지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외국에 갔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공식적인 교육이나 신학적 배경을 거의 가지지 못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나, 선교열정이나 경건심을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할레 선교회와 모라비안 선교회는 18세기 전반에 선교무대의 중심부를 석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근대선교
영국의 근대선교는 1649년에 창설된 뉴잉글랜드의 복음선포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와 함께 시작한다. 이 단체는 원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선교를 위해 설립되었다. 1698년에는 기독교지식전파협회(Th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가 발족되어 북아메리카에 이주한 백인들의 종교생활을 도왔는데, 사업이 확장되면서 본의 아니게, 교육과 문서선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1701년에는 해외복음선교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조직되어 해외 거주 영국인들의 영적인 문제를 돕고, 이교도들인 토착원주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왕실의 허락을 받아 일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은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1761-1834)인데, 그는 1792년에 ‘이교도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조사’라는 87쪽의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이 선교에 끼친 영향은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의 선언과 비견될 수 있다고 한다. 케리는 1793년 6월 13일에 인도로 출발하여 40년 동안 선교사업에 종사했다. 

미주

(1) 최형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역사, in: 선교학회(편), 선교학 개론, 84.
(2) 파리, 로마, 베네디치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 1537년에 신부서품을 받았고, 1544년 로마에서 예수회 수도원 법규를 제정했다. 그의 신학의 근본사상은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성령과 교회는 서로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중시했다. 그는 엄격한 훈련을 통한 교회의 갱신에 기여했고, 1622년에 성자의 칭호를 받았다.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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