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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라는 악

기사승인 2022.09.04  04: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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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 단테의 신곡에 그려진 지옥문 앞에는 침묵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벌을 받고 있다. William Blake, 「The Vestibule of Hell and Souls Mustering to Cross the Acheron Blake」 (c.1824-27) ⓒWikimediaCommons
정의가 물 같이, 공의가 멈추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 (아모스 5:24)

이 말씀은 야훼를 찾으라는 말씀과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고 함께 아모스를 대표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생각하지 않고 야훼를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야훼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고 그것들을 땅에 실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약자 편에 서시고 약자를 지지하시는 것이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정의가 굽어지고 공의가 메마른 현실이 제사/예배와 절기에 의해 은폐되느니 이것들을 폐지하고 정의가 바로 펴지고 공의가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분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의와 공의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정의는 그 낱말(미쉬파트) 그대로 다소 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고, 공의(쩨데카)는 구조, 구제, 베풂 등과 같은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인(仁)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의와 공의는 상호보충적일 수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정의는 기계적이고 차디찰 수 있습니다. 반면에 공의는 따뜻할 수 있지만 정의가 없으면 값싼 은총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양자의 관계는 공의를 입은 정의, 정의를 품은 공의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뼈와 근육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단순하게 말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볼 때 양자가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는 까닭을 어느 정도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가운데서 공의와 정의는 계속 흐르고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흘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이 끊어지기를 원하고 멈추게 하려는 세력이 언제나 있습니다. 약자를 부의 원천으로 삼고 윤리적 기준을 교묘한 말로 무너뜨리고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뒤바꾸고 가해자를 피해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에 맞서 정의와 공의가 끊임없이 흐르는 강처럼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게 하려면 전쟁을 하는 것과 다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모스는 악한 때에 '지혜자들'이 잠잠한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최선은 물론 차선도 아닙니다. 악한 현실에 동조하고 악에 굴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침묵이 정의와 공의의 흐름을 끊는다면, 사랑은 정의와 공의가 흐르게 하는 힘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용기가 사랑으로부터 솟아나는 오늘이기를.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 앞에서 정의와 공의를 위해 일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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