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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라리 방화사건과 ‘빨갱이’ 담론

기사승인 2022.08.13  16: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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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의 계보학과 탈식민지 정치 ⑶

▲ 불타는 오라리. 미군 촬영반이 제작한 4‧3 무성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공중에서 촬영한 것이다.

제주의 생활세계는 평등과 공동체주의

제주는 일제 때부터 저항의 문화가 대단했다. 6만 명 정도가 오사카로 진출하고 그곳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이나 취업 또는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운동에서 주도급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 패망 후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국제적인 식견을 갖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제주의 치안을 유지한 인민위원회는 몽양의 민족주의에 근거한 조선인민공화국에 매료되어 있었다. 일종의 주민 치안위원회로서 행정을 담당했다.

심지어 하지 장군도 제주위원회의 민주적 지도력에 놀랐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이들에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정치적 토대가 된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런 상식이 없었다. 하지 장군의 비타협적인 성품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일제의 관료체계와 일제 경찰 출신들을 미군정에 소속된 치안 부대로 편입한 데서 사달이 난다.

1947년 3.1절 행사를 주도한 곳은 남로당이 아니라 민전이었고, 몽양의 민족화합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1946년 12월 제주의 정치 성향에 대한 미군정의 보고문서를 보면 인민위원회가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신중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드러운 좌파적 성향 즉 야당적이며 소요나 봉기와는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제주 3.1절 행사는 좌우합작이 성공한 시민운동의 첫 실례에 속한다. 서울에서는 좌우대립으로 얼룩져 3.1절 기념 행사를 같이 나누지 못한 것에 비하면, 제주의 3.1절 행사는 달랐다. 한국 현대사 초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런 무고한 이들에게 빨갱이로 낙인찍고 명예를 박탈했는가? 오히려 미군정은 자신들의 미소 공의회의 난관을 민족화합을 통해 도움받기를 원하지 않았는가?

3.1절 시가행진에서 말을 탄 경찰의 부주의가 도화선이 되어 총격 사건이 벌어지고 여기엔 젖먹이를 안고 사망한 젊은 여성이 있었다. 경무국장이란 자가 진심어린 공식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으면 되는데, 정당방위라고 하는 뻔뻔함이 결국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사죄는 고사하고 2,500여 명을 붙잡아다가 심문하고 고문했다. 심지어 세 명이나 고문치사로 죽었다고 하니 4.3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경무국장에게 있다. 3.1절 행사의 총격 사건에서부터 흔히 48년 메이데이(May Day)로 알려진 ‘오라리 방화사건’까지 모든 책임은 처음부터 ‘빨갱이 섬’이란 담론을 유포한 경무국장과 이를 두둔한 미군정에 있었다.

이 사이에 사실 김익렬 중령과 무장 대장인 남로당 출신의 김달삼 간의 평화협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을 오라리 방화사건이 무참하게 깨버렸다. 심지어 메이데이 영상(KBS가 제주 4.3 73주년을 맞아 칼라로 복원한 영상)은 무장대를 토벌하고 양민을 보호하고 사살당한 주민들을 보여준다. 미군 정찰기가 상공을 감시하고, 고급관리들이 제주를 방문하고 해상을 점검하는 것을 보여준다.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갖지만 동시에 4.3 진압 작전에 미군이 군사적으로 개입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46년 12월에 나타나는 정치 동향 보고서와 48년 5월 메이데이 필름 사이에 얼마나 큰 이율배반이 존재하는가?

사실 미군은 당대 최신무기로 무장된 자들이고, 이미 필리핀과의 전쟁에서 갈고 닦았던 초토화 작전이나 물고문 그리고 주민 전체를 학살하고 마을을 태워 없애 버리는 전략에 익숙했다. 미군은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고 한국 경찰과 부대 그리고 우익단체들이 관여했다고 손사래 치지만, 이것은 필리핀에서 보여준 이들의 주특기였다.

1992년 4월 발견된 다랑쉬 동굴은 1948년 12월 18일 당시 9연대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국가 폭력과 초토화 작전으로 희생된 이들은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에서 만난다. 이들이 칼 마르크스의 ‘자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기에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없다. 다랑쉬굴은 4.3의 유효한 역사의 상징이 된다.

경희대 교수 존 에퍼제시(John Eperjesi)가 다랑쉬굴을 최초로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발점으로 본 것은 탁견에 속한다. 절대적인 희생자는 말할 수가 있을까? 인도 출신 가야트리 슈피박 교수는 젊은 과부로 화장(사띠)에 처해진 자신의 할머니를 기억하면서 탈식민주의 화두를 열었다.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동굴 속에 묻혀버린 이들의 목소리는 제주의 생활세계에 녹아 들어와 있고, 우리에게 정직하게 역사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말하는 파레시아(parrhesia-진실 말하기)의 태도를 요구한다. 파레시아는 엘리트들의 대변이나 국가기관의 관료제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로부터 그리고 희생자를 위해 행해진다.

계보학적 문제틀과 ‘빨갱이’ 담론

미군의 초토화 작전은 이승만 재임 이후가 아니라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계획된 것이다. 이것은 미군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로부터 온다. 필리핀과의 전쟁에서 미군은 이들을 야만인으로 부르면서, 야만인만이 유격 활동을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최대의 화력과 무기를 가진 미군과 싸움을 하는데 빈약한 필리핀 부대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제주의 350명 유격대처럼, 이들과 연루된 가족들은 야만인으로 취급받았고 거리낌 없이 살상당했으며 마을은 불태워졌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하지 장군과 함께 이양기에 군사와 안보에 관한 협정을 조인했고(1948, 8.24), 이것은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대한민국의 안보를 유지하고 훈련시키는 책임과 권한을 가졌다. 하지의 경력에는 일제로부터 필리핀 탈환을 위해 레이테(Leyte)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나온다. 미 정부는 임시군사고문단을 설립했고(1948, 8월 15일), 윌리엄 린 로버츠(William Lynn Roberts) 준장은 100명의 미군사고문단을 뽑아 대한민국 군인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1948년 5월부터 49년 6월까지 고문단장과 주한미군 사령관을 겸했고 제주 군사작전에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다.

더욱이 현장 진압을 맡은 로스웰 브라운(Rothwell H. Brown) 중령은 “사건 원인엔 흥미 없다. 내 사명은 진압뿐”(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8일)이라는 헤드라인으로 회자가 된 인물이다. 제주 현지에서 한 인터뷰를 보면 중요한 부분이 드러난다. 그는 딘 군정장관 명령으로 제주로 부임했고 ‘속히 진압’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밝힌다. “나는 원인에 대하여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 내가 평정에 성공한 다음 다시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고 조선인 행정기관의 책임이다.”

제주 4.3의 계보학은 여기서부터 문제틀화 한다. 브라운이 자신의 미션이 신속한 진압에 있다는데 그것이 함축하는 내용이 무엇일까? 더욱이 “내가 평정에 성공한 다음 다시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고 조선인 행정기관의 책임이다”라는 말에서 그가 시도한 평정에서 나타나는 신체정치학은 무엇인가. 사실 브라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버마-인도 전선에서 중국군 탱크부대를 지휘한 악명높은 자였고 국가로부터 은색 훈장을 받았다.

브라운의 신속한 강경 진압은 박진경 중령에 의해 5천 명이라는 대량체포와 무분별한 살상으로 시행된다. 김익렬 장군의 회고록에서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은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독립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부하들에 의해 살해된다. 이 일은 미군정에 폭풍우를 불러왔다.

이후 브라운 중령에게 보낸 윌리암 린 로버츠(William Lynn Roberts) 준장의 비망록(1948년 6월 21)을 보면 그는 송요찬을 추천하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그는 무자비한 군인이고 우리가 기용할 수 있는 최고다.” 브라운의 신속한 진압을 수행한 자들은 박진경과 송요찬인데 더 중요한 것은 브라운의 빨갱이 조작에 있다. 당시 미군정의 자료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이상한 부분들이 나타난다. 브라운 중령의 ‘제주도 활동 보고’(5월 22일~6월 30일)에서, 그는 제주의 남로당원들은 중앙당의 지시를 통해 “철저하고 오랜 계획”을 수립했다고 쓴다. 이들은 최고급 전문가들과 선동가들에 의해 훈련받았으며, 1946년부터 1948년 5월까지 공산주의 선동과 책략을 주도해 왔다.

과연 이러한 보고가 맞는 걸까? 그렇지 않다. 중앙의 남로당 조직이 1946년 11월 23일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제주에서 남로당은 독자적인 행보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전과 연대 활동을 했다. 민전에는 박경훈 도지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31절 기념행사에 대한 무차별 진압에 저항하고 사표를 내고 이후 1947년 7월 18일 민전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남로당과는 상관이 없고 몽양을 존경했다. 그러나 몽양은 안타깝게도 그의 민전 의장 취임 하루 만에 암살당했다(7월 19일). 심지어 제주 남로당에 대한 보고서(6월 20일)를 보면—거의 브라운 중령의 구두 진술에 근거되어 있다— 대규모의 군사훈련이 1948년 2월에 실시되었고, 심지어 소규모의 무장대원들이 한라산 중턱에 있는 군사 캠프에서 훈련과 군대 규율식의 생활을 하고, 경찰과 경비대들에 대한 테러 공격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제가 한라산 주변에 버리고 간 군사 기지들을 접수하고 1948년 1월까지 군사 캠프로 십분 활용했다.

대체 어떤 증거에 근거했길래 제주의 민족연합운동가들이 ‘빨갱이’ 테러리스트들로 둔갑하는가? 오히려 제주 남로당의 지도자들은 1948년 1월에 대거 체포되었고 이어 2.7 총파업 투쟁의 여파로 인해 지속적인 미군정의 체포와 구금이 두려워, 결국 앉아서 죽느니 저항이라도 하자는 급진적인 의견으로 선회된다. 물론 여기에는 무장 저항에 반대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들의 투쟁은 거의 생존 투쟁 수준이었지 브라운 중령이 몰아가는 것처럼 1946년부터 일제가 버리 간 군사시설을 사용하고 전문 군사 책략가에 의해 훈련될 정도로 활용되지 않았다. 총과 죽창을 든 사람들 가운데에는 젊은 여성과 고등학생들도 있었다고 보고되는데 과연 이들이 조직적인 군사 캠프를 통해 훈련과 규율이 갖추어진 인민해방군인가?

더욱이 전국을 소요로 이끈 남로당의 2.7투쟁은 제주에선 큰 반향을 갖지 않았다. 48년 4.3에 대한 외부의 성명서들을 보면 이들이 통일임시정부를 위해 헌신하고 이남에서의 단독선거를 반대했다는 내용은 인민당에서 나온다. 적어도 남로당의 이름으로 이들과 연대하는 성명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심지어 무장대에 대한 경찰의 공식보고(1948년 9월 17~24일)를 보면, 겨우 184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활동적이었고, 대부분 경찰과 서북청년단들에 대한 분노를 가진 비무장한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해서 음식과 정보제공 그리고 은신처를 마련해준 정도이다. 결국 이들 모두 다 인민해방대로 둔갑되고 심지어 산으로 올라가 피신하지 못한 사람들은 가가호호 뒤지는 처벌 진압이나 중산간 마을에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떼죽음을 당했다. 결국 제주 4.3은 브라운 중령에 의해 초기 강경 진압과 초토화 작전으로 시도되었고, 이후 미 행정부에 인민 해방대의 활동으로 조작 보고된다.

계보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제주 4.3에 대한 이러한 브라운 중령의 정치 담론화는 이데올로기적인 권력 담론으로 드러나며, 미군의 물질적 이해관계 즉 반공주의와 남한 단독 정부수립 그리고 소련과의 패권 대결이 깔려있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지배 담론은 물질적인 이해관계와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서 작동되면서, 미 군정부의 신체정치학 즉 이들에게 저항하는 자들과 시민들에게 무시무시한 국가권력의 죽음의 정치(necropolitics)를 마음대로 행사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정치 권력을 유엔이 허락한 적도 없고, 미군정은 조선의 연방 국가의 기능을 갖지 않는다. 하지가 1945년 취임 연설에서 미군정이 유일한 합법정부로 선언했다면 이 부분은 계보학적으로 문제틀화가 되어야 하고, 유엔이나 국제사법소에서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 속한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조선 백성을 해방된 백성으로 다루게 되어 있는 미군정이 국가 비상사태나 전쟁에서 행사할 수 있는 신체정치학을 마음대로 행사해도 되는가?

2019년 유엔에서 열린 4.3심포지엄에서 시카코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1945년부터 1950년 이전까지 희생자 수를 십만에서 이십만으로 주장한다. 거기다가 조선 시대에 역모죄를 지은 자의 가족들이 받는 연좌제가 있었다. 이것은 야만이다. 제주 4.3평화재단의 공식 집계로는 희생자가 삼만 명이지만, 희생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우드로 윌슨에게서 정치학 공부를 했다는 것이 지극히 의심스러워진다. 그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빨갱이로 몰았던 수치스런 유산이 군사독재 정부를 통해 한국의 현대사에 여전히 이어진다. 국가보안법의 최대 희생자는 제주의 선량한 사람들이지 않은가? 더욱이 유족들은 연좌제로 인해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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