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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조회를 통한 일제의 분열 획책

기사승인 2022.08.13  15:5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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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간도,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 (8)

▲ 동아일보 1936년 4월 1일 자에 실린 김동한 사진과 관련 기사

일제와 만주군의 끊임없는 토벌로 인하여 항일유격근거지는 엄청난 파괴를 당하며 한편으로 경제봉쇄로 식량난에 봉착하여 중공동만지역의 당내와 군대내 그리고 유격지 가족들 가운데 서 대대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일제의 간도협조회 창설

일본 제국주의는 1934년 9월 투항자, 변절자, 귀순자를 모아 연길헌병분대의 특무외곽조직인 “간도협조회”를 세웠다. 간도협조회는 특무를 항일유격지에 잠입시켜 가짜 편지, 요언(謠言)을 날조하는 등 수단으로 당과 군대 내부의 혼란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동만특위의 간부들은 간도협조회의 음모와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민생단이 당에 대거 투입되었다고 확신하며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10월 1일 중공만주성위가 동만지역의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반민생단투쟁 가운데 “서로 불신하는 경향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중공만주성위 또한 반민생단투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므로 민생단투쟁을 장기적이고 무자비하며 복잡한 계급투쟁으로 보며 “동만당과 인민혁명군은 일체 역량을 동원하여 대중 속에 들어가 심입된 계급투쟁을 확대하여 반민생단투쟁을 광대한 대중들의 운동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는 그릇된 지시를 내려 보냈다.(1)

그릇된 지시를 받은 중공동만특위 임시집행위원회 서기 왕중산은 10월 1일자 중공만주성위 편지를 받은 후, 11월 5일 동만특위 특별회의를 열었다. 그는 회의에 의도적으로 조선인 간부 이상묵과 주진을 참가시키지 않았다. 회의 후 반민생단투쟁이 다시 고조되었다. 회의에서 포치(布置)한 투쟁은 사전에 당과 공청단현위 및 구위의 3분의 2이상이 민생단이며 당과 공청단 기관은 수량 면에서 10분의 6~7은 민생단이라는 틀을 짜놓고 당내와 군대내 그리고 대중 가운데서 전면적인 반민생단투쟁을 전개하였다. 심지어는 화룡현 대중가운데 10분의 9, 군대가운데 10분의 6~7이 민생단분자 라고 하면서 투쟁의 폭풍을 일으켰다.(2)

1935년 초에 간도협조회는 첩자를 보내 한영호가 식량구입을 위해 부대를 떠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영호사건”을 조작하였다. 한영호는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제1퇀 3연 연장 박춘과 독립사 사장 주진 등을 민생단분자로 지목하였다. 곧 이어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이상묵도 연루되었다. 주진과 이상묵이 도망치자 이 사건은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어 주진의 수하에 있던 30여 명의 간부들이 민생단분자로 몰려 총살을 당하게 되였고 동북인민혁명군의 패장이상의 간부가 80여 명이나 총살을 당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민생단분자로 숙청된 사람이 400여 명에 달하여 근거지내에서 공포에 휩쓸린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고 귀순하였다.(3)

1935년 3월, 간도협조회는 사람을 파견하여 회장인 김동한의 이름으로 이송일에게 쓴 가짜 편지를 왕청현 자피거우 유격구 안에 던지게 하였다. 이 가짜 편지로 인하여 반민생단투쟁 가운데 냉혹하기로 소문이 난 이송일도 민생단분자로 몰려서 총살을 당하였다.(4)

동만지역 당과 유격근거지, 군에서 3년 가까이 진행된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당시 중공만주성위를 포함한 당 조직 내에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1934년 12월에 부임한 중공만주성위 서기 양광화는 민생단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보고 중공하얼빈시위 서기 위증민을 중공만주성위 전권대표로 파견하여 해결을 모색하도록 하였고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는 일련의 지시들을 보냈다.

그러나 1935년 2월에 중공만주성위 길동순시원 오평은 동만특위에 편지를 보내어 동만특위가 중앙과 성당위와 반대되는 노선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유격구 내 10분의 6,7이 민생단이라는 것은 과장이며 만약에 그렇다면 인민혁명군이 진작 일본에게 멸망당했을 것이며 유격구의 대중들과 인민혁명군 안에는 단지 소수의 민생단분자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5)

위증민은 1935년 1월 중순에 연길현 삼도만 장지영에서 중공동만특위 지도자들을 만난 후, 2월 27일 왕청현 하마탕 대황위에서 중공동만특위와 공청단 동만특위의 제1차 연석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위증민, 왕덕태, 이학충 등 20여명이 회의에 참여하였는데 반수 이상이 조선인 간부들이었다. 위증민은 회의에서 중공동만특위 임시집행위원회의 사업보고를 듣고 중앙정치노선의 집행과 적들과의 투쟁 상황 및 금후의 투쟁과업에 관한 결의와 반민생투쟁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으며 동만특위에서 직접 지도, 관리하는 숙반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6)

연석회의는 반민생단투쟁에 관한 결의에서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였다. 하나는 (고위직 민생단 첩자였던) 수령과 하층대중 간에 분별없이 일률적으로 가혹한 형벌을 하고 총살해 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위직 민생단 첩자였던) 수령과 대중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자복하도록 (엄중한 형벌로) 위협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는 잘못을 시정하고 명확한 사실 확인 절차를 밟아 재판해야 하며 민생단 수령의 기만, 위협을 받아 민생단에 가입한 대중들에 대하여 분별할 것을 요구하였다.

3월 21일 중공동만특위는 왕청현 요영구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의 정위연석회의를 열었다. 위증민, 독립사 정위 왕덕태, 독립사 정치주 주임 이학충 및 제1퇀 정위 임수산 등 도합 11명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는 반민생단투쟁에 문제에 관련하여 “먼저 주요 지도기관의 민생단분자들을 숙청하고 점차적으로 민생단 간부와 각성하지 못한 민생단을 숙청해야 한다. 그러나 책략과 방법 면에서 대황위회의에서 채택한 ‘반민생단투쟁에 관한 결의’대로 처리하여야 하며 협박하여 공술하게 하고 또한 그것을 믿는 그릇된 작법을 금지하고 민생단의 기층 분자를 구별하여 정치교양의 방법을 실시하여야 한다.”(7)라고 지적하였다.

위증민도 역시 반민생단투쟁의 허구성과 민족 차별과 계급투쟁의 핵심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오직 과열처리와 과잉처벌 방법만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얼마 후 위증민은 소련에 가서 코민테른 제7차 대표대회가 열리는 기회에 코민테른주재 중국공산당대표단에게 ‘반민생단투쟁’문제를 포함한 동만지구의 항일투쟁문제를 구두와 서면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위증민이 소련으로 간 사이에 중공동만지구 당 조직에서는 반민생단투쟁을 계속하여 “민생단의 특위와 각 현위 성원” 25명을 체포하였다. 중공왕청현위 서기 겸 중공동만특위 숙반위원회 주석 및 선전부장인 이송일, 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독립퇀 퇀장 윤창범, 제2퇀 정위 김락천, 원 제3퇀 퇀장 이남규, 원 공청단 동만특위 서기 김창연 등이었다. 이들은 체포된 후 바로 총살당하였다.(8) 동만지구 반민생단투쟁은 1936년 초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그러나 동만항일유격근거지가 해체되고 인민혁명군 제2군이 이동함에 따라 그리고 소련에 갔던 위증민이 돌아옴으로서 동만지역의 반민생단투쟁은 종말에 이르렀다.

반민생단 투쟁의 종말

소련에서 돌아온 위증민은 3월 초 안도현 미혼진에 있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의 주둔지에 도착하여 중공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지도간부회의를 열고 군대와 당의 건설사업에 관계되는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지도간부회의는 반민생단투쟁 문제를 토론하고 실제정황에 비추어 사실근거가 없는 고문에 근거한 공술에 의하여 민생단분자로 몰려 마안산에 감금되어 있는 100여 명의 동지들을 석방하고 그들을 다시 군대에 편입시켰다. 회의는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35년에 소집했던 확대회의의 결의대로 사업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제출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미 투쟁이 끝났음을 알렸다.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에 의하면 민생단분자로 몰려 사형당한 사람이 500여 명이나 되며 그 가운데서 현급 이상의 간부가 40여 명이나 된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실제적 증거가 있는 민생단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일제와 만주국의 끊임없는 토벌과 반민생단투쟁으로 동만지구 당조직은 엄중한 손실을 입었다. 1933년 중공동만특위 산하에 5개 현위, 24개 구 당위, 100개의 당지부에 1,403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1936년에 와서는 중공동만특위는 이름뿐이고 산하에 현위가 없어졌으며 단지 남, 북 두 개 특별사업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4개 구 당위, 12개 당지부에 248명의 당원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20세기 30년대 초 전 동북에서 중국공산당 조직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동만지역 당조직은 마비상태에 빠져 동북혁명군 제2군에는 정치간부와 군사간부가 모자라는 위기가 나타났다.

미주

(1)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연변조선족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11), 309.

(2)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150

(3)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151-152.

(4)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152.

(5)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연변조선족사 상권』, 311.

(6)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연변조선족사 상권』, 311-312

(7)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연변조선족사 상권』, 312.

(8)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155.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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