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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진과 실패

기사승인 2022.08.11  13: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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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이름이 그 위에 있는 사람들(신명기 28,1-10; 요한계시록 3,7-13)

▲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세계를 향한 거대한 청사진 속의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Getty Image

성서의 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관계를 규정하는 계약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는 쌍방이 지켜야 할 내용들이 있고 이행여부에 따른 보상과 벌칙이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출애굽 역사 회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게 된 동기와 과정을 밝히는 일종의 서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은 계약 이행에 대한 보상을 다룹니다. 계약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직접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명기 법전을 포함한 성서 전체의 목표이기도 하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본문에 따르면 야훼의 이름이 ‘그 위에서’ 불려지는 자들입니다. 동일한 표현이 성전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성전은 야훼의 이름이 그 위에서 불려지는 집입니다(왕상 8,43).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거기 두셨기 때문입니다(신 12,5).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위에’ 두시고 ‘이스라엘 위에서’ 그 이름이 불려지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야훼의 이름이 그 위에서 불려진다’는 것은 야훼께서 그의 이름을 거기 두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계약에 따른 보상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계 모든 민족들 ‘위에’ 두신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 이 구조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구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표로 세계 모든 민족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 위에 있어서 그의 이름이 그 위에서 불려진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겠습니까? 3절부터 8절에 나오는 복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개별적인 풍요와 집단적인 안전이 약속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참 좋다 하셨던 것이 이러한 상태를 뜻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또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행복한 대동세상입니다. 이스라엘이 대표로서 그러한 상태에 이른다면, 사람들은 이를 보고하나님을 부를 것이고, 이로써 그 복은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도 열린 가능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이 이러한 청사진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그리 되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야훼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의 명령을 간직하고 행하는 것이 그 조건입니다. 이것이 계약의 내용입니다. 매력적인 계약인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얼핏 보면 간단하고 별로 어려울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주 이야기 되고 또 누구나 아는 것처럼 야훼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는 것은 그 원리가 많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이 그 원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사랑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것에 어긋날 수 능력도 있습니다. 이를 뭉뚱그려 말한다면 욕심 또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계 이상의, 부당한, 쓸데없는’ 등의 수식어가 붙어야 오해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양자는 많은 경우 충돌하는데 욕심을 이길 만큼 사랑이 큰 것은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두 마음이란 말을 여기에 사용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마음을 요구하시는데 사람은 두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마음과 육신으로 표현하며 그 충돌의 고통 때문에 ‘아, 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주시겠습니까?’라고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롬 7,24). 계약이 제시하는 아름다운 세상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위에서 불려지는 자들입니까?

계시록에서 주님은 필라델피아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이 교회는 힘이 약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이 그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인내의 말씀’이란 인내하며 끝까지 나를 붙잡고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던 엄혹한 시절에 그들이 보여준 인내란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인내는 외적인 위협에 대한 인내일 뿐 아니라 두 마음으로 인한 내적 위기에서의 인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말씀의 내용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 의도는 분명한 9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인내하게 했습니다. 인내는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그 사랑이 그들의 남은 시간도 인내하게 할 것입니다. 두 마음을 이기고 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 인내이고 역으로 인내를 낳는 것이 한 사랑과 그에서 비롯된 한 마음입니다.

한 마음으로 인내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장차 있을 시험의 때도 면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아울러 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는 자를 하나님의 성전 기둥이 되게 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과의 계약내용이 여기서 최종적으로 확대된 형식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막무가내로 요구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해지고 성령의 열매로 거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불의와 불공정과 비상식이 우리 주변에 또 우리 안에 넘치는 시대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 위에 하나님과 주님의 이름이 새겨지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과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인내할 수 있도록 서로 기억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의 길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과 주님의 이름이 우리 공동체 위에 새겨지기를 빕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 기쁨을 낳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환희를 더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생명이 자라게 할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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