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오순절 운동과 에큐메니칼 선교

기사승인 2022.08.02  01:33:03

공유
default_news_ad1

- 기독교 선교의 본질과 과제 ⑶

▲ 오순절 계통의 폭발적인 선교의 증가세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기적과 치유를 오늘날에도 맛볼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출발했다. ⓒGetty Image

오순절 운동의 선교

오순절 운동이 과연 신학을 갖고 있느냐는 의혹은 오순절 운동이 ‘한 세대 전까지 주목할 만한 문헌을 필요로 하거나 남기는 일 없이 문화의 가장자리에 그냥 남아있기를 원하는 문맹자들인 농부, 촌사람, 뱀 장수, 또는 건달들의 운동으로 간주되어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오늘 오순절 운동에 신학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오순절 운동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전통들과 발전을 보여주기 때문에 공통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신학은 그 운동만큼이나 다양하지만, 그 특징적인 신학적 테마들을 중심으로 굳이 정리한다면, ‘구원, 신유, 성령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등으로 구성된다고 하겠다. 심프슨(A. B. Simpson)은 ‘사중복음’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 성결케 하시는 이, 치료자, 오실 왕’으로 이해함으로써 오순절 운동의 네 가지 신학적 특징을 그리스도론적으로 구성했다. 다시 말해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 성령세례 주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 치료자로서의 그리스도,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이 네 가지 그리스도론적 주제들은 모든 오순절 운동에 공통되게 등장하는 오순절 사상의 기본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처음부터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에 참여한 오순절 운동은 20세기 가장 큰 선교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모든 해외 선교사들의 10%가 오순절 운동에 속해 있다는 통계도 있다. 오순절 선교의 놀라운 성장 배경에는 선교사들의 능력이나 교육, 새로운 방법의 개발이 아니라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도적 방법을 신실하게 따르는 삶이 있다.

오순절 선교는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 특히 치유의 기적이 우리 시대에도 경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치유 기적은 복음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과 위안일 뿐만 아니라 신자에게는 확신의 표지이며 불신자에게는 증거가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순절 선교는 또한 영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영 세례는 특정한 시간에 몸의 경련을 수반하는 분명한 경험으로 느껴지고 방언에 의해 확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오순절 선교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영 체험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성서를 무시하는 태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비판한다. 성서에 대한 실제적인 무시는 이른바 ‘능력복음주의’ 안에서 드러난다. ‘능력복음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 체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환상, 혹은 신비한 지식과 개념을 강조하는데 이런 강조가 확신을 줄 수는 있지만 그만큼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맥그라스는 지적한다. 그 외에 오순절 선교운동에 대한 비판은 윤리적 성화 없는 열광주의, 영에 대한 분별문제, 지나치게 자의적인 성서해석, 지나치게 물질적으로 이해된 구원론과 기복성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순절 선교운동이 제도권 교회 안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되는 부분은 은사운동을 통한 교회갱신과 복음화, 신앙의 확신과 열정의 부여, 교회의 양적 성장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세계적으로 가장 급속하게 증가하는 오순절 운동이 ‘성공 그리스도교’, ‘번영의 그리스도교’, ‘능력 그리스도교’ 등으로 불리며, 축복과 성공 지향적이며, 오순절 선교운동의 구성원들이 더 이상 가난한 민중이 아니라 중산층과 부유한 기업가들이라는 점은 비판받고 있다.

에큐메니칼 선교

에큐메니칼 선교는 좁은 의미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전개된 선교운동을 뜻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콘실리아 선교들’(Conciliar Missions)을 뜻한다. 여기서 의식적으로 복수로서의 ‘선교들’을 말한 것은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 교회들이 아니지만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선교를 하는 교회들과 단체들을 포괄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에큐메니칼 선교가 당면한 과제는 무엇인가? 이 과제를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은 1982년 7월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선교와 복음화 - 에큐메니칼 확언’이라는 문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문서는 복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개신교 주류,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 내용은 ‘회개’,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된 복음’, ‘교회와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의 교회의 일치’, ‘그리스도의 방식에 따른 선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 ‘6대륙 안에서, 6대륙을 향한 선교’, ‘살아있는 신앙들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의 증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 가운데 ‘살아있는 신앙들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의 증언’에 대해서만 비판적 입장을 취했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위에서 언급한 7가지 주제들 가운데 에큐메니칼 선교가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은 일치,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의 선교, 다른 살아있는 신앙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라고 하겠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주도로 에큐메니칼 선교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강조했다. 20세기에 실제적인 구조적 일치에 대한 이념을 열정적으로 추구한 경험이 있는데 남 인도교회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다양한 교파적 전통을 지닌 개신교가 장래에 구조적인 일치에 대한 이상을 성취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교파적 분열의 스캔들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그리스도인이 소수집단인 지역, 그리스도교가 서구로부터 수입된 지역인데, 교파적 분열을 극복하고 다양한 차원에서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려는 노력은 더 심화될 전망이다.

1980년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와 복음화 대회의 중심 주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었으며, 당시 복음화 되지 않은 지역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지역에 속해 있다는 점이 인식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심연은 갈수록 깊어지고, 가난한 나라들에서 자연의 파괴와 땅의 착취가 더 심화되고 있다. 빈곤의 세계화는 가난한 교회와 부유한 교회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게 할 것이다.

1963년 멕시코 시티에서 개최된 '세계 선교와 복음화 대회'는 ‘6대륙에로의 선교’를 중심이상으로 삼았다. 대회에서 분명해진 것은 지금까지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진행된 일방적인 선교는 그 반대 방향으로부터의 선교와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선교는 다방향적(multidirectional)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다방향적 선교개념을 실현하는 실제적인 노력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 대회 주제의 배경에는,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주교가 일련의 저서에서 강조한 것처럼, 사실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무런 매력을 주지 못하는 서구세계에서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깔려있었다. 이른바 선교지 영역에 그리스도교적인 그러나 세속화된 서구세계도 포함되게 된 것이다.

갈수록 서로 다른 민족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접촉이 활발해지는 세계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는 살아있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설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개종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역사에 맡기면서 대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에큐메니칼 선교는 직면해 있다. 내부적인 논쟁이 있지만 에큐메니칼 선교는 대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모든 사람의 그리스도라는 신념을 희생시키거나, 선교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 대화는 그리스도교 선교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교적 노력은 본질에 있어서 대화적이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선교는 주요 종교적 공동체들이 상대에 대한 승리주의보다 상호존중과 참된 상호이해의 정신으로 서로 관계 맺기를 희망한다.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