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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순간인데 뭘 그렇게

기사승인 2022.08.01  1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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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리석은 부자 비유 다시 읽기

▲ Rembrandt, 「The Parable of the Rich Fool」 (1627) ⓒWikipedia

전도서 1:2,12-14; 2:18-23는 인생의 헛됨을 순간성에 두고 있습니다. 시편 49:1-12도 마찬가지로 “12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라고 인생의 순간성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3:1-11 역시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라고 말하면서 순간적인 땅의 삶을 위해 투자하지 말고 새사람이 주도하는 위의 세상을 향해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13-21의 내용은 더욱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순간성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오직 오늘과 자신의 삶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유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면 순간의 삶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 어리석은 사람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가 밭에서 많은 것을 추수하였습니다. 그 추수한 것이 엄청 많아서 더 쌓아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더 많이 지어서 그 추수한 것들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행복하였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음 놓고 먹고 즐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네 영혼을 내가 찾아가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소유가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부자를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비유의 위치와 배경

본 비유는 비유 자체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비유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배경 속에서 이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본 비유는 누가복음 12장 13~34절까지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독립된 비유라기보다는 이 같은 전체 구조의 맥락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12:13~34절은 삶에 있어서 재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한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 13~14: 유산에 관한 논쟁
② 15: 탐심에 대한 경고
③ 16~20: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④ 21: 비유의 결론
⑤ 22~34: 제자들의 삶에서 적용에 대한 가르침

그러므로 본 비유는 예수의 재물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본 비유의 해석은 무엇보다도 본 단위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유산 논쟁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유산 논쟁은 무엇을 남겨주고 있습니까? 

13~14절 그리고 15절: 유산 논쟁, 탐심의 문제

유산 논쟁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고 또 실지로 경험하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반영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과 동생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산 논쟁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유대교 법에 따라 장남은 아버지의 땅을 그리고 그의 모든 재산의 두 몫을 가지게 되고, 나머지를 가지고 다른 아들들이 분배받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법의 규정은 현대적인 의미의 공평성 논쟁을 넘어서서 매우 명확한 것이기에 다툼이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형제들은 싸우고 있습니다. 왜 싸우는 것일까요?

탐심 때문입니다. 형도 동생도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는 두 사람의 유산 논쟁에 끼어들기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탐심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그 어떠한 내용의 해결책이라도 싸움을 근절시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래서 유산 논쟁의 해결사 노릇 하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는 유산 논쟁을 거부하면서 표면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인생의 깊은 본질이 문제인 탐심과 그리고 인생을 오직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소유적 차원의 수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다루고자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의 삶이 아직도 유산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제 우리도 유산 논쟁으로 상징되는 소유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존재의 삶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유산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세대를 향하여 외치는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이 우리의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까?

Dalai Lama는 총카파(영향력 있는 티베트 불교 승려이자 철학자이자 탄트라 수행자였으며 그의 활동으로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가 형성되었다.)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집착(애착)은 내적 또는 외적 대상 안에서 자신을 유쾌하게 만들거나 혹은 매력적인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그것을 욕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관심이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강화되면 옷에 묻은 기름기를 제거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는 매우 힘듭니다.

집착은 대상을 향한 욕망의 질의 악화의 현상이며, 우리를 목마른 욕망, 즉 갈애(渴愛),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으로 인도합니다. 탐욕은 우리로 대상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태로 이끌어 갑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과 믿음의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이 같은 고정적 혹은 강박적인 집착은 우리로 탐욕과 사치의 영역에 완벽하게 갇히게 합니다.

계속해서 달라이 라마는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글로벌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만족감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질주의 사회는 생존을 위한 기본 요구 사항이 충족되었음에도, 우리로 더 많은 것을 욕망하고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강박감 속에서 살게 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물질적인 제품이 우리에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정교한 광고가 만들어집니다.

최신 액세서리를 비롯한 각종 화려한 장식구, 패션 아이템의 소유는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의 물질주의는 우리로 비현실적인 탐욕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불만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매일의 삶에서 절제와 현 소유와 소비에 대한 만족의 실천을 필연적인 요소로 이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욕망, 탐욕과 탐심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탐심과 탐욕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오늘의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매일의 삶에서 절제와 현 소유와 소비에 대한 만족의 실천”을 하기 위한 성서적 원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6~21절: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

이 비유는 많은 곳에 유사한 내용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외경인 집회서(11:18~19)와 에녹 1 서(97:8~10)에도 기록되어 있고 도마 복음서(말씀 63)도 본 유사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 비유는 무엇보다도 탐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탐심이 왜 어리석은 것인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본 비유를 읽어보면서 우리는 비유의 주인공인 부자에 대하여 큰 반감을 갖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자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게서 아무런 도덕적 혹은 법적인 잘못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부자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고 조금은 억울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이 부자에 대하여 이런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탐심의 본질: 이웃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탐심은 무엇인가? 탐심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쌓아두고 싶어서 더 많은 것에 대하여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탐심은 결국에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서는 이러한 탐심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부자가 하는 말에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17~19)

‘내 소출’, ‘내 곳간’, ‘내 곡식과 물건’, ‘내 영혼’ 그리고 ‘내가 즐기자’ 등 ‘나’가 강조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에게 이웃과 하나님이 차지할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관한 관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탐심의 근본적인 모습입니다. 탐심은 우리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게 만듭니다. 탐심은 우리로 하나님과 이웃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탐심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예수가 이러한 부자에 대하여 박한 평가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의 어리석음: 소유의 순간성을 이해하지 못하다

뒤이어 본 비유는 부자가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부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소유가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인 양 여기고, 그것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아닌 것을 그런 것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그것을 산크리스트어로 ‘아비디야’라고 말합니다. 아비디야는 왜곡된 무지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무지에서 비롯되어 갖게되는 현실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그릇된 인식은 사람들로, 그릇된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이는 엄청난 도덕적, 윤리적 결과를 초래하게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잘못된 지식, 왜곡된 무지를 우상숭배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얼마나 엄청난 결과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까? 어리석은 부자는 영원하지 않은 소유를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자에게 아비디야와 우상숭배는 물질 소유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는 소유의 영원함에 대하여 착각하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오늘 우리가 내 것이라고 소유하고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순간적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는 허약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세계 최고의 전자제품 회사인 소니도 어느덧 삼성 전자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앞으로도 100년은 너끈히 갈 것 같았던 자동차 회사 Toyota도 100년의 역사를 등에 업고 추락하고 있습니다.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며 승승장구하던 GM도 2009년 그 신화의 막을 내렸다. 10년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닷컴 신화의 주역이었던 기업들은 지금 간데온데없고 지금은 애플과 구글이 호령하고 있습니다. 100년 기업이 한순간에 사라지는가 하면 신흥기업이 세상을 호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을 호령하는 기업이 언제 사라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순간이라는 이치를 깨닫고 겸손히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교만하지 않고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하나님 안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마치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부자가 어리석다.’라고 하는 평가를 받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부자는 영원하지 않은 것에 자신의 삶을 걸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는 이 비유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21절)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관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삶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에서 나타난 부자의 언어인 “나”가 “하나님” 혹은 “이웃” 즉 ‘우리’로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자기가 이룩한 삶의 성과를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나누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관심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 걸까요? 오늘 비유의 결론에 주의를 기울여봅시다. 비유의 결론은 21절과 그리고 33절과 34절에 구체적인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33~34절)

오늘 비유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당시 누가의 공동체 안에는 부자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서 방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의 예를 따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만을 위한 재물의 축적에 대한 탐심을 버리고 오히려 참다운 부(富)인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해 주신 부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여서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한 부(富)를 쌓아두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부자가 부(富)에 대한 왜곡된 무지, 아비디야와 우상숭배의 망령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인식을 가지게 되더라고 그는 계속해서 부자(富者)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삶의 고백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내 곳간의 문을 열어서)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두겠다.(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와서 가져가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내 영혼(모든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너는(우리 함께)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17~19)

그런데 과연 이런 일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나라를 향하는 믿음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아비디야나 혹은 우상숭배가 아닌 참믿음은 우리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마가복음 9:23)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모두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따라가지 말고 그리고 순간적인 물질의 부에 우리의 삶을 맡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부(富)를 쌓아두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각자의 삶의 상황 속에서 각자가 결단해야만 합니다.

세 사람을 입어야!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면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순간적인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합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고 예수를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진정한 지식과 믿음에 이릅시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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