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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생단 투쟁의 도화선과 왜곡

기사승인 2022.07.30  16: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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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간도,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 (7)

▲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반민생단 투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생단이 와해되고 난 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 투쟁은 동만지역의 당 조직과 혁명대열 및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민생단❯조직을 숙청한다는 목적으로 일어났고 무려 3년 반 정도나 지속되었다.

송영감 사건

동만 조선인공산당원들을 얼어붙게 만든 반민생단 투쟁은 1932년 10월에 “송영감 사건”에서 시작되었다.(1) “송영감”은 당시 중공 연길현 로두구구위 문서였다. 같은 해 8월 초에 “송영감”은 로두구의 일본군 헌병분견대에 체포되었다가 1주일 후에 돌아와서 헌병대 유치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였다. 이 사건은 중공로두구 구위의 의심을 샀다. 그리하여 그는 로두구구위 문서로 돌아가지 못하고 연길농민협회가 발행하는 ❮농민투쟁보❯ 인쇄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0월 16일 연길현 세린하부근에서 활동하던 연길현항일유격대가 로두구 일본군 헌병분주소 헌병 상등병과 통역 주모 등 3명이 응암산(일명 매바위산)에서 지형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출격하여 일본군 상등병을 사살하고 통역 조모를 포로로 잡았다. 주모는 심문을 받을 때 “송영감”이 일본군헌병대에서 파견한 밀정이라고 자백하였다. 중공연길현위에서는 즉시 “송영감”을 체포하여 고문을 하였다. 악형을 견디지 못한 그가 자신이 “민생단”이며 20여 명의 민생단원이 당내와 유격대 안에 있다고 자백하자 중공동만특위는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모두를 총살하였다.

민생단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중공팔도구구위, 옹성자라구위, 의란구구위로 퍼졌다. 팔도구의 한 유격대원은 아무런 이유 없이 민생단원으로 체포되자 죽음을 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 달아나면서 총을 나무에 걸어 놓고 “나는 민생단원이 아니다. 나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 싸우련다.”는 쪽지를 남겼다. 얼마 후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죽었다.(2)

반민생단 투쟁의 불길이 화룡현으로 번졌다. 1933년 3월,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인 김성도가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 가서 청산위원회를 설립하고 평강구농민협의회 책임자인 이화춘을 체포하고 심사도 없이 “민생단분자”로 몰아 총살하였다. 이때부터 화룡항일유격근거지에서 2~3개월 사이에 “민생단분자”로 몰려 살해된 사람이 수십 명에 달하였다.(3)

당시 중공동만특위는 고달픈 투쟁 상황과 좌경사상의 영향으로 민생단의 침투에 대하여 너무 과대하게 평가하였다. 1933년 5월에 중공동만특위 기관지인 ❮양도전선❯은 서기인 동장영이 쓴 “민생단의 역할, 토대 및 민생단을 반대할 데 대한 당의 과업”이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와 만주의 자산계급들이 민생단이라는 주구단체를 조직하였다. … 형형색색의 한국민족주의자와 파쟁주의자(그들은 공산주의 가면구를 쓴 민족주의자들이다.)가 … 모두 이 주구 민생단조직에 모여들어 민생단의 간부로 되었다. 때문에 민생단 주구단체를 반대하는 투쟁은 우리 당의 당면한 각항 과업에서 가장 중심으로 되는 과업이다. 이 과업은 동만당의 과업 일뿐만 아니라 전 만주 당조직의 과업으로 되었다.”고 강조하였다.(4)

반민생단 투쟁의 왜곡

6월 초에 중공길동군 상무위원인 반경우와 양파가 중공만주성위 대표단을 구성하여 중공동만특위소재지에 와서 동장영을 회견하였다. 그들은 동장영에게 중공중앙의 “1.26” 지시서한(5)과 “1.26” 지시서한을 지지하는 중공만주성위의 결의를 전달하였다. 이는 당의 극좌노선을 배제하는 새로운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이해하고 동만특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민생단투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서기인 동장영과 중공왕청현위는 오히려 제1차 확대회의에서 지시서한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며 정세를 분석하면서 왕청현위 서기 이용국과 군사부장 김명균을 “민생단분자”로 낙인찍었다. 왕청현위 제1차 확대회의 후 동만당과 당원들 속에서 제1차 “반민생단투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이용국은 총살당하고 김명균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망쳐서 만주국에 위장 투항을 하였다. 그 후 학교에서 일하면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7월, 계속해서 반경우는 중공동만특위 동장영과 함께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에 가서 훈춘 당, 단 간부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중공중앙의 “1.26”지시서한과 “1.26”지시서한을 지지하는 중공만주성위의 결의를 전달하고 중공훈춘현위에서 소비에트정권을 건립한 것은 좌경로선이며 민생단의 음모라고 하였다. 그는 중공훈춘현 서기 서광을 일본 특무, 훈춘유격총대 제2대대 정위인 박두남을 “파쟁분자”이며 “민생단분자”라고 의심하고 출당을 선포하고 유격대 정위 직무를 철소하며 총을 회수하였다. 그리하여 박두남이 반경우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사건 발생 후, 중공동만특위는 이상묵을 훈춘에 파견하여 “반혁명숙청운동”으로 단번에 60여 명의 간부들을 모아 한 사람을 제하고 모두 총살하였다. 중공훈춘현위 선전부장이었던 김규봉도 “민생단 핵심분자”로 몰리어 1934년 봄에 총살을 당하였다.

그리고 지주나 부농 출신, 글 쓸 줄 아는 지식인, 과거에 민족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사람, 조선공산당 계파에 속했던 사람, 투쟁 중에 오류를 범한 사람, 유격구 생활에 불평을 하는 사람, 밥 먹을 때에 밥알을 떨어뜨린 사람들을 모두 “민생단분자”로 몰아 100여 명을 숙청하고 총살하였다.(6)

1934년 1월 7일, 공청단만주성위는 유격구와 유격대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반혁명민생단분자 200여 명을 색출하여 그 두목 12명을 총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934년 9월, 중공동만특위는 제1차 확대회의를 열고 투쟁의 예봉을 조선공산당에 참가하였던 보통당원과 대중들에게 돌렸으며 특별히 당의 각급 지도 간부들에게 돌렸다.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김성도는 “파벌투쟁수령”이라고 지적을 당하고 직무를 해임 당하였다. “민생단 두목”으로 지목당한 그는 손가락을 깨물어 “나는 민생단이 아니다.”라는 혈서를 썼으나 끝내 총살을 당하였다.

중공동만특위 제1차 확대회의 후 반민생단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으며 투쟁의 대상과 범위가 광범위해졌다. 10월 7일 중공동만특위는 민생단이 연길현 한 개 현에만 해도 1,200명 내지 1,500명이 있다고 보고하는데 이는 당시 민생단투쟁이 얼마나 과장되고 가공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중공왕청현위 서기였던 이용국이 총살된 후, 서기직무를 이어받은 김권일, 왕현항일유격대 대장 양성룡은(7) 중공화룡현위 서기 김일환, 유격대 정위 차용덕, 중공훈춘현위 서기 최창복, 선전부장 김규봉, 공청단훈춘현위 서기 정필국, 연길현 유격대 대장 박동근, 정위 박길등이 민생단분자로 몰려서 총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되었고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1934년 10월에 이르러 민생단자 분자로 몰려 사형을 당한 사람이 수백 명이 넘었고 동만지역의 당 조직과 항일유격대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8)

미주

(1) 황용국 외 다수,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 봉화』 (민족출판사, 1989), 167.

(2)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141.

(3)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11), 306.

(4)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141-142.

(5) 1.26 지시서한은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에서 중공중앙의 명의로 “만주의 각급 당부 및 전체 당원들에게 1933년 1월 26일에 보낸 서한이다. 만주의 상황과 우리 당의 임무를 논함 이란 지시는 좌경노선의 착오를 비판하고 적색지역과 백색지역의 대립상태를 극복하고 항일유격근거지와 적통치지역의 인민들 간의 상호관계를 강화하였으며 우수한 간부들을 적 통치지역에 파견하여 군중을 모으는 사업을 전개하여 항일유격근거지의 영향을 확대하고 광범한 군중들로부터 여러 면의 지원을 받으며 관문주의 착오를 숙청하여 항일유격대와 각 항일부대간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서 항일 유격대와 기타 항일부대가 항일통일전선을 폭넓게 결성하며 연합작전을 벌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홍5월투쟁”과 “길돈폭동”처럼 폭력으로 단숨에 혁명에 도달하려고 하는 극좌노선을 버리라는 지시였다.

(6)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145.

(7) 유격대원들의 항의로 양성룡은 총살은 면하였으나 직위해제를 당하였다.

(8)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148.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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