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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민중을 대체하다

기사승인 2022.07.04  14: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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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운동의 균열에서 읽어내는 한국 사회운동의 균열 ⑵

▲ 제도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한국 사회는 민중이라는 당파적 용어가 사라지며 상식에 기반해 있다는 ‘시민’이라는 개념이 급 속도로 확산되었다. ⓒGetty Image

3.

1987년 이후의 민주화와 소비자본주의의 발달은 한국 근대화에 대한 시민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민중이라는 용어로 집약되었던 대항 근대화의 설득력이 약화되었고 민중의 자리는 (대항 근대화가 아닌) 한국 근대화의 당위적 주류여야 한다는 믿음이 깔린 시민이라는 용어가 대체했다. 그리하여 사회비판적 사유의 분화와 주류 교체가 이루어졌고, 이는 대항 근대화 비전에 기반한 사회비판적 사유에 의해서 총체적 의식화가 이루어지던 종전 양상의 쇠퇴를 동반했다. 그리고 보수 정당과 리버럴 정당은 1987년 이후 정권을 번갈아가며 잡게 되었고, 양 정당 모두에 자신이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자기규정 하는 사람들의 참여가 늘었다.

이렇게 되면서 민중 용어를 사용하던 사회운동 전반이 쇠퇴했다. 그나마 자본주의 사회 고유의 제도적 차원의 조직을 가질 수 있는 노동운동이 오히려 이 시절에 자신의 조직을 확장하면서 민중 용어를 보전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 역시 조직의 확장 과정에서 이미 한번 이데올로기의 약화가 있었고 이후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계급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민중 용어를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의 형해화(形骸化) 현상까지 이어진다.

한편, 민중이 시민으로 대체되면서 체제 변혁의 언어보다 “상식에 기반한 운동”을 내세우는 언어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언어는 리버럴 진영과 보수 진영 간의 경계짓기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언어가 되어 앞에서 지적했던 대항 근대화 비전에 의한 총체적 의식화의 효과를 일정부분 대체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언어가 경계짓기의 정당화에 미치는 효과 또한 점점 커지게 되었다.

사회운동과 사회비판적 사유의 이러한 변화에 일정부분 힘입어 김대중/노무현의 리버럴 정부가 출범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가시화된 것 중의 하나는 리버럴 진영과 진보 진영의 구분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리버럴 정당 + 반독재운동에서 반보수운동으로 전환한 일부 세력 + 일부 시민운동 세력 + “상식에 기반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등으로 구성된 리버럴 진영 내에는 그 이전의 반독재/반보수 운동의 정서와 새롭게 형성된 “리버럴=진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정서가 겹쳐 있었다.

이 시기부터 시민운동 전반에 시민운동 인사의 정부 참여와 시민운동 사업 일부의 정부 프로젝트화 현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반면 이 시기부터 리버럴 진영과 긴장관계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한 진보 진영은 민중 용어를 보전하고 있던 노동운동과 여타 사회운동을 중심으로 “리버럴 = 진보“에 대한 믿음의 그늘에 노동자와 일하는 사람들의 희생이 존재함을 폭로한다는 입장에 주로 섰다. 양 진영의 긴장관계는 때로는 서로에 대한 강한 부정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4.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범주 안팎으로 앞에서 지적했듯이 공식 기구 운동과 연합기구 운동의 양 갈래를 형성하고 있던 기독교 사회운동에서는 민중이 시민으로 대체되던 시절부터 기독교 사회운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종종 나왔으며 이 질문은 현재도 완전한 답을 얻었다고 보기 힘들다. 일부는 민중의 시민으로의 전환에 호응했고, 일부는 여전히 민중에 천착했지만 논쟁의 결과라기보다는 활동가 개개인의 선택인 측면이 강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총체적 의식화의 쇠퇴와도 연관이 있다.

이 시기부터 기독교 사회운동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도(영성 고유의 가치와는 별도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얻기 힘든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자와 사회복지 이슈 등에서 조직과 교회의 활로를 찾고자 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기구 운동의 차원에서는 공식 기구 운동은 해외원조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게 되면서 보수적 기구와의 협력/긴장관계에 신경을 써야 하게 되었고 연합기구 운동은 민중 용어의 쇠퇴 과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에큐메니칼 운동 세력 일부가 앞에서 지적했던 시민운동 일부의 정권 참여에 같이 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기독교 사회운동의 이러한 정체는 한때 기독교 사회운동의 운동 이데올로기가 되기를 자청하기도 했던 민중신학에도 영향을 미쳐 이후 지금까지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의 각개약진의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와중에 이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시도로,  민주적 주체를 자임한 시민의 욕망에 의해 발생하는 사회적 배제를 지적하는 언어로 민중을 적용/재해석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민중신학의 민중이란 용어 내부에 몰입과 거리두기 효과가 공존했다면 이제 거리두기 효과를 민중 용어의 주 효과로 사용하는 사유가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편 신앙운동의 저류를 유지하고 시민의 등장에 호응했던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은 교회개혁 이슈가 부각되면서 대중성을 얻게 된다. 대형교회들의 리더십이 보여 주는 파행과 세습 문제, 일부 우파적 교회들의 광화문 집회 등이 일반인들에게도 부정적으로 비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 그 배경이 되었다. 교회개혁 이슈에 대한 고민이 진전되면서 이 이슈가 문제가 되는 교회 몇몇을 개혁하는 이슈가 아닌 보수적 신앙 전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문제라는 공감대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신앙적인 몰입/헌신 효과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대안적 신앙의 요청이 생겼다.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이 이 요청에 응답하려 노력하면서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 개념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며 신앙적/신학적 시도의 범위도 그 전보다 더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 개념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신앙적/신학적 시도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아카데미 형태로 진행되는 강좌 사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과의 관계도 많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여기서 이후의 논의와 관련해 지적할 점 두 가지는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의 강좌 사업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일반 사회운동의 영향력과는 일정하게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과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이러한 강좌 사업 등의 시도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황용연 연구기획위원장(제3시대그리스도교 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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