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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해져가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자리

기사승인 2022.06.25  23: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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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 William Blake, 「Job’s Evil Dreams」 (1821) ⓒWikimediaCommons
야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유심히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 그가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는데 네가 나를 충동해서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했다.(욥기 2,3)

세상은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법을 익혀오고 있습니다. 스스로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영역을 끝없이 넓혀 갑니다. 이를 ‘성숙해져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이 경향의 시작을 에덴동산에서 볼 수 있고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제지할 수 없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바벨탑 사건에서 오늘의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꾸 주변화하는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욥기가 이런 물음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욥은 하나님을 외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이는 아들들이 혹시라도 죄를 짓고 속으로 하나님을 욕했을까 하는 염려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엉뚱한 방식으로 갑자기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도발로 이어졌고, 욥은 사탄에게 맡겨졌습니다. 사탄은 그의 재산을 차례차례 파괴하고 끝으로 자식들을 앗아갔습니다. 재산을 잃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들의 몰살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약탈자들과 천재지변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들이 욥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이 사건들을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주? 심판? 천벌?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불행은 충분히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놀라울 정도로 버팁니다. 무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상황을 하나님을 부름으로 견디고 있는 이 욥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본문이 그의 고통에 대해 일체 보도하지 않는다고 그에게 아픔이 없겠습니까? 슬픔이 없겠습니까?

사탄을 다시 만났을 때 하나님은 이런 상태의 욥을 두고 위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욥이 견뎌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안도하고 한편으로는 자책(?)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렇게 자기를 지키고 있는 욥인데, 사탄의 충동 때문에 그를 쳐서 이 지경이 되게 했다고 사탄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거기서 멈추지 않지요. 사탄은 그만큼 끈질기고 영악하고 지독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어디까지 내려가게 되는지 드러내려고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서 욥 시험에 대한 허락을 또 한 차례 받아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을까요? 소유의 상실과 자식들의 죽음과 친구들의 비난과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요? 그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그 하나님이 침묵을 깨고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해주실 것을 기대하며 이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그 물음을 끝까지 붙잡았습니다. 이 물음이 극한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승인할 수 있는 보루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침묵을 깨뜨리시고 그 앞에 있는 그에게 오셨습니다.

성숙한 세상에 자기 자리를 내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사는 오늘이기를. 어떤 위협이나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우리의 존재 이유를 하나님 앞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 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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