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른후트에서 온 편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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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절 아침 헤른후트 교회 온 교우들이 흰 옷을 입고 공동식사를 하는 전통이 있다. ⓒ홍명희 |
성령강림절 아침이 되면 온 교우들은 되도록 흰 옷을 꺼내 입고 교회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한다. 이는 모라비안 헤른후트 교회 전통이다. 차와 커피는 준비가 되어있고, 빵과 치즈 등 자기가 먹을 것은 가지고 간다. 이번 300주년을 맞는 헤른후트 교회는 마을 사람들과 뭔가 특별한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양쪽 길을 막고 차 없는 거리로 만든 다음,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모두가 원하지 않는 굵은 비가 내렸다. 그때가 6시였는데 8시가 되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다. 비가 그치더라도, 차가운 거리에 앉는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계획했던 김밥도 만들지 않고 느긋이 남편과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밖에서 팡파르가 울리더니, 갑자기 날씨도 맑게 갰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충 두꺼운 겉옷을 입고 거리를 나가 보았다.
세상에나!
길게 펼쳐진 하얀 테이블에 하얀 옷을 입은 어르신들이 이미 나와 앉아서 식사하고 계셨다. 뒤늦게 나오는 가족이 마지막 테이블에 앉았다. 하얀 테이블은 로도덴트론의 보라색 꽃과 하얀 야스민 나무꽃으로 장식했다. 나는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빈손으로 몇 걸음 걷다 보니, 시계방 친구 하이디가 반갑다고 손을 흔들며 앉으라 한다. 나는 그들이 주는 음식과 음료를 받아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테이블에는 미국, 중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함께했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와서도 풍족히 먹고도 남았다.
얼른 김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따뜻해졌으니, 하얀 원피스를 챙겨 입고, 남편도 후다닥 하얀 와이셔츠에 연그린 색 양복을 입혔다. 그리곤 김밥을 들고 다시 나갔다. 아직도 서로 인사하면서 음식을 들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로 옮겨 다니는 분들이 많았다. 음식을 권하면서 대화와 웃음이 울려 퍼졌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뒤늦게 가지고 간 김밥을 꽤 많은 사람이 환호를 지르며 하나씩 집어갔다.
예쁘게 모자를 맞추어 쓴 듯 세 명의 할머니들이 소녀처럼 예뻐 보여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늘만큼은 초상권이네, 뭐네, 주장하는 엄숙한 분위기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늘 흙이 묻은 바지 입고 성도들의 무덤가에서 일하시는 부카르트 아저씨가 흰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이태리 남자처럼 멋지게 밀짚모자를 쓰셨다. 최고로 멋졌다. 얼마 전 딸들이 입던 옷을 정리하다가 거의 흰색에 가까운 멋진 슈트를 우크라이나에서 온 마리나에게 주었는데, 마리나가 웃으면서 이 옷이 오늘 자신을 건졌다며 웃었다. 하얀 옷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 엄마가 만든 우크라이나식 케이크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엄마 아빠 모두 고향에 두고 나온, 빅토리아는 오늘만큼은 환히 웃었다. 그녀의 동생이 처음 인사를 했다. 15살의 소년이다. 그가 스무 살 넘은 청년이었다면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독일어를 막 배우는 중이다. 순수하다. 제발 그들의 부모가 전쟁의 끝자락에서도 살아남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이날만큼은 부모님 안부도 묻지 않았다. 잠시라도 전쟁의 고통을 잊고 오랜만에 환히 웃기를 바랬다.
평소에 늘 일에 지쳐있는 케르스틴이 천사처럼 예쁘게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웃으며 다가왔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또한 집의 창문을 가리는 커튼을 멋지게 머리에 올려 쓴 자매들도 있었고, 하얀색 장식 머리띠를 한 자매도 있었다. 모두가 아름답고 멋졌다. 갑자기 풍선을 높이 하늘로 올려보내는 순서가 있었다. 멀리멀리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았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던 그 하늘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시다. 오늘이 그 성령님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했다.
마지막에 서로를 격려하면서 “성령님과 함께 삽시다!” 또는 “성령님은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마을의 축제로 성령님은 저기 멀리 밀려나 계신 듯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성령님이 아니라면, 서로가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사실 헤른후트에는 여러 개의 개신교가 있다. 가톨릭 사람들도 있다. 또한 교회에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마을 분들도 있다. 헤른후트에서 수많은 선교사가 세계 곳곳으로, 저 멀리 히말라야 산맥까지 갔지만, 이곳 자체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아무튼 함께 일 년에 한 번 통합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그 예배 시간보다 오늘처럼 하얀 옷을 입고 서로 음식을 나누고 바라보면서, 더욱 가까워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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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절을 축하하는 헤른후트 온 교우들 ⓒ홍명희 |
성경에 보면 천국에는 막상 먹고 마시는 일이 없다 한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천국 같은 삶을 누리려면 함께 먹는 일만큼 더 귀한 일이 없다. 무디가 빵 하나를 놓고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림도 좋지만, 그 빵을 얻기 위해 밭에서 일하다가 함께 드리는 밀레의 만종 기도는 더욱 좋다. 빵을 얻기 위해서는 일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빈손으로 식탁에 나갔을 때, 나에게 채워진 커피 잔과 빵, 그 위에 치즈…. 모두가 풍족히 나누었다. 거기다가 모두 웃고 있는 한 테이블 사람들. 너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두에게 나누어졌을 때, 먹고도 남음이 있었다는 것은 주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볼 수 있다. 주님이 하신 이적도 감동이지만,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후에 바닷가에서 다시 본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생선을 구워 “와서 먹으라!” 하신 장면에 늘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그분은 그런 사랑의 분이시다. 잘못을 책하시기 전에, 먹을 것을 챙겨주시는 그 넓은 마음. 제자들은 그 생선을 눈물 없이는 먹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언젠가부터 교회에서 밥을 먹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나는 그것이 참 자랑스럽다. 작은 이민 교회에서도 늘 밥을 먹는 것은 교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벌써 오래전 독일 남부지방의 튜빙엔에 한인교회에서 먹던 밥. 그리고 광부로 간호사로 오셔서 가난한 유학생들을 먹인다고 늘 많은 양의 고기를 삶아 오시던 그분들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다. 우리 집에 사시는 한 아저씨가 뜬금없이 잔디밭에 식탁을 놓고 혼자 식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분은 그 식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모습이 신기하다고 사진을 찍어 놓은 큐흘러 할아버지는 그의 부고를 그 사진과 함께 공동주택의 게시판에 거셨다. 그 식사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다. 늘 혼자 사는 집 부엌에서 식사하셨는데, 아름다운 햇빛이 비치는 밖으로 나오고 싶으셨을 것이다. 모든 세대 창문에서 다 보이는 잔디밭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찬란한 아침 햇살에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면서 식사를 하시던 모습은 정말이지 평화로웠다.
기도 탑 아래 첫 집에 사는 하늘 노래라는 예쁜 이름의 부인은 현관문에 이렇게 현판을 내 걸었다. “이 집은 누구든지, 아무 때든지 들어와서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2차 대전에 피난을 경험하신 두 분은 이 집을 부모님에게 물려받으면서부터 이런 글귀를 붙이셨다. 언젠가 남편을 부축해서 산책하고, 기도 탑 길을 내려오면서, 그야말로 배고프고 춥고 그랬다. 내려오면서 하늘 노래 부인네 집이 내려다보였다. 정말이지 오늘은 이 글귀대로 한번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두 부부는 감자수프가 있으니 얼른 들어오라고 하셔서 염치 불고하고 들어갔었다. 다른 때보다 감자수프를 많이 했다면서, 두 그릇을 주셨다. 몸과 마음이 수프로 인해, 따스하게 데워졌다. 우리는 접시에 눌어붙은 감자까지 빵으로 싹싹 깨끗이 닦아내며 먹었다. 그 아름다운 식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도 미안하지 않도록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있는 식사였다. 이 집을 방문하고 나올 때마다, 흥얼거리면서, 역시 부인의 이름대로 하늘 노래가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 작은 헤른후트 마을에는 아직도 이런 인정이 살아있는, 성령님이 기뻐하실 만한 식사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홍명희 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