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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로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기사승인 2022.06.10  14: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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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6

▲ 저스틴 타니스 목사 ⓒGetty Image

1.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에큐메니안] 독자 중에서도 이 복음성가 좋아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부르셨다는 말을 영어로 쓰면 calling이고, 이걸 다시 번역한 말 중에 소명이라는 말이 있죠.

보통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목사의 소명을 받았다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만, 굳이 목사에게 한정될 필요도 없는 말일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자리 곳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식별하고 그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일 터이니 말입니다.

2.

2019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트랜스젠더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저스틴 타니스는 목사이고 트랜스남성입니다. 즉 지정 성별은 여성이었지만 성적 정체성은 남성이었고 성별 재지정 과정을 거쳐서 지금은 지정 성별 남성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지정 성별 여성일 때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후 성별 재지정 과정을 거쳤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여성 목사였다가 남성 목사로 바뀐’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지정 성별이 남성이었지만 성적 정체성이 여성이어서 성별 재지정 과정을 거친 트랜스여성 사제(성공회)도 소개됩니다. 물론 이 목사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남성 사제에서 여성 사제로 바뀐 경우’이지요. 두 경우 모두 다 한국에서라면 아직 보기 힘든 경우일 것 같긴 합니다.

이 책의 흥미있는 여러 논의 중에 트랜스젠더의 삶을 소명으로 이해하려는 논의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트랜스여성 사제. 그 사제가 성별 재지정 과정을 거친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는 인생에서 오직 두 가지 소명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사제가 되는 소명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이 되는 소명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저스틴 타니스는 자신 역시 (몸과 영의 젠더가 분리된 것이 아닌: 필자주) 하나의 젠더 속으로 부름받은 소명, 사회가 젠더를 보는 관점의 한계를 초월하라는 소명, 타인들이 자신의 젠더에 관해서 (이른바 생물학적으로: 필자주)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 너머에서 살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저스틴 타니스에 의하면, 젠더를 소명으로 이해할 때 젠더에 대한 하느님의 역할을 보게 되고 현재의 젠더 불일치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본질을 완전히 탐구할 책임을 인지하게 되지요. 이 소명은 동시에 참된 자기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소명이기도 합니다.

이런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과 같은 트랜스젠더는 말하자면 ‘여성으로서도 살아 보고 남성으로서도 살아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도 되겠다 싶습니다. 소명이라고 말하게 되면 그 진부한 선천적이니 후천적이니 하는 말을 안 해도 되겠다는 거 말입니다.

3.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곳에서~ 예배하네~”

서두에 인용한 찬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사입니다.

앞에서 나온 트랜스젠더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보며 저는 이 가사가 트랜스젠더의 소명에 잘 들어맞는 가사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하기야 꼭 트랜스젠더의 소명만이 아니라 모든 소명에 다 들어맞는 가사이겠습니다만.

지정 성별이나 사회의 성 역할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명에 따라 자기의 삶을 사는 삶.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라는 범주도 결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참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출발점일 뿐인 삶.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커밍아웃하며 살아가는 삶.

먼저 간 길이 없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길이 되고, 삶의 주어진 조건이 없으니 살아가는 대로 그것이 삶이 된다는 저 노래 가사와 잘 들어맞지 않나요?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성소수자가 아니라는 소위 ‘이성애자 시스젠더’의 삶도 그냥 주어진 대로만 살아가면 되는 삶이 아닐 겁니다. 당장 페미니즘이 왜 나왔는지만 생각해 봐도 그렇죠.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저런 소명을 받았다면, 그 소명을 받은 성소수자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소명도 당연히 존재하고 ‘이성애자 시스젠더’들은 그런 소명을 받은 것일 테니까요.

4.

위에서 소개한 트랜스남성 목사와 트랜스여성 사제를 보면서 우리 교단엔 저런 목사와 사제가 없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목사나 사제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께 한 마디 드릴 말씀은, 이미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 목회자들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 교단’ 운운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명색이 목사나 사제라는 분들이 모르고 있냐는 겁니다. 왜냐구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게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인데 우리 교단 운운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미 성소수자로 부름받아 부르신 곳에서 예배하는 성소수자 교인과 목회자들이 있다면 성소수자를 인정하니 마니 떠드는 일 자체가 교회의 본질을 해치는 일이기도 할 테구요.

황용연 대표(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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