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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조선의용군의 비극

기사승인 2022.05.21  16: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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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동북조선의용군 그리고 조선인민군 (3)

▲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북한에 입국한 조선의용군 ⓒ 『조선의용군의 밀입국과 6·25전쟁』 (김중생 [서울: 명지출판사, 2017]) 중에서

전쟁이 끝나면 군인, 혁혁한 전공을 세운 유능한 군인은 최고 권력자에게 위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가 함께 전공을 나눌 수 있는 권력자의 핵심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토사구팽(兔死狗烹)을 당할 수 있다. 국공내전이 끝난 자리에 남겨진 6만의 조선인 대군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계륵(鷄肋)이었다. 대의명분과 보상 없이 해산시킬 경우 그들이 반란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평화 시에 필요가 없는 6만 대군을 유지시키려는 일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조선의용군이 하루아침에 만난 관계가 아닌데다 전선에서 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함부로 내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북조선의용군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생색도 내고 명분도 살릴 수 있는 길이 국토완정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에서 나왔다. 북한은 1948년은 2월 8일에 조선인민군 창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조선의용군의 일제 해방 이후 북한 입국

1948년 12월 초, 소련군의 북한 철수에 앞서 모스크바에서 북한 인민군의 무력을 증강시키고자하는 비밀회의가 열렸다. 소련 국방상 불가닌과 극동군 사령관 말라놉스키, 해군사령관 글로코브, 제1부수상 말렌코프, 북한 대표 최용건, 그리고 중국 대표까지 참석해 북한에 대한 특별군사사절단 파견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중국 측은 만주에 있는 한인 중국군 20,000-25,000명을 입북시켜 인민군을 증강시킨다는 데 합의를 하였다.(1)

중국으로서는 일시에 동북조선군의 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하였다. 학자들은 이를 1948년 11월 중국의 내전이 승리로 끝남에 따라 중국으로서는 비대해진 한인부대가 부담스러워졌고 조선의용군이 입국을 원하였기 때문이며 소수민족인 한인들을 대대적으로 군에서 강제 퇴출시킬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현재와 미래의 민족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며 남한에 있는 미국으로 자신들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속셈을 깔고 있는 결정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중국 측의 합의해 따라 동북조선의용군의 입국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회의가 49년 1월 하얼빈에서 열렸다. 북한 대표는 최용건, 무정, 방우용이 동북조선의용군에서는 중국군 166사 사단장 방호산, 목단강군구 독립제3사단 수송사단장 방덕경, 하얼빈 보안여단장 주덕해가 참석하였다. 중국 대표로는 중국공산당 동북정치위원회 이입삼, 동북인민해방군 주보중 등이 나왔고 소련군 대표단도 나왔다.

이런 협상과 배후조정 끝에 방호산이 지휘하는 중국군 166사단은 1949년 7월 25일 입국, 인민군 6사단이 되어 신의주에 사령부를 두었다. 인원은 10,800명이었다. 김창덕이 사단장인 중국군 164사단은 1949년 8월 23일 함북 회령을 거쳐 나남에 도착을 하였고 10,000명 규모의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5월에는 전우가 중국군 20사단 내의 조선의용군과 다른 지역의 한인들을 모아 10,000명 규모의 인민해방군 중남군구 독립 제15사를 조직하였고 이 부대가 원산으로 입북하여 인민군 12사단을 편성했다.

이밖에도 1,000~2,000명 정도의 동북조선의용군이 산발적으로 입북해 인민군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북조선의용군은 북한군 전체의 1/3을(2) 북한군 전력강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조선의용군에서 조선인민군으로

가슴이 아프지만 한때는 조선의용군이었고 한때는 동북조선의용군이었던 조선인민군 5사단과 6사단, 12사단이 되어서 한국 침략 전쟁 선두에 섰다. 6사단은 1군단에 속하였고 5사단과 12사단은 2군단에 속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인민군 1군단은 해주, 개성, 연천을 거쳐 서울로 향했다. 2군단은 춘천을 거쳐 수원을 점령해 서울을 남쪽에서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인민군 사령부는 서울 점령임무를 6사단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다. 만주파와 소련파가 지휘하는 1, 3, 4사단과 105전차 여단에게 주었다. 4사단장 이권무는 연안파였지만, 1사단장 최광, 3사단장 이영호, 105전차여단장 유경수는 모두 만주파였다.(3)

인민군의 일자척인 목표는 28일 서울 점령이었다. 1군단은 파죽지세로 문산, 의정부를 지난 3일 만에 서울에 다다랐다. 그러나 동부전선을 맡은 2군단은 목표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6월 25일 춘천 점령, 28일 수원점령이라는 작전 목표가 주어졌고 예하에 모두 3만 5천 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그들은 한국군의 강력한 저지로 계획한 시간에 서울 남쪽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2사단은 38도선을 넘어 춘천을 공격하고, 12사단은 603모터싸이클연대의 지원을 받아 춘천을 우회해 홍천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5사단은 예비사단으로 화천에 주둔시켰다.(4)

7월 24일 미국 정찰기가 한반도 서남쪽에서 미상의 군대가 이동하고 있음을 발견 하였다.그 부대는 북한군 6사단으로 1개의 모터사이클연대 함께 서해 방면으로 공격하며 7월 20일에는 군산과 전주를, 7월 23일에는 영광과 고창을 점령하고 무서운 속도로 낙동강전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5)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에서 한때는 조선의용군이자 동북조선의용군이었던 ‘중공군 출신의 한국인들’들을 언급한다.

7월초 미국의 일일전황보고서들은 조선인민군 보병은 “일급”이고, 장갑부대와 포격기술은 “2차 대전의 어떤 군대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에게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부대는 ‘중공군 출신의 한국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방호산 휘하의 제 6사단이었다. 6사단은 옹진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라도 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7월 말경에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해안을 따라 힘차게 나아가더니 8월 1일 진주를 점령하여 부산을 코앞에서 위협했다.(6)

사단장은 방호산으로 그는 40년대 초반에 팔로군에 속하였으며 연안에서 조선독립연맹에 가입하여 조선의용군이 되었고 동북조선의용군시기에는 1지대의 정치위원이었다. 그는 중국의 국공내전에 끝난 시점에 실력을 인정받아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의 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실전과 이론을 겸비한 6·25전쟁 기간 중에 가장 탁월한 전술을 펼친 전략가로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시작된 전라남북도의 빨치산과 군·경에 의한 토벌과 반 토벌전 및 보급투쟁으로 빚어진 억울하고 비참한 민초들의 죽음과 한(恨)을 본다. 물론 더 큰 책임은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한 사람들, 약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에게 있지만 그와 6사단이 전라남북도의 땅을 누비며 인민 해방을 선포하였으므로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영웅이었던 방호산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서 종파주의자로 몰려 숙청을 당하였다. 그 뿐 만아니라 한국전쟁을 지지하고 참여하였던 연안파, 남로당계 심지어는 소련파까지도 대대적으로 숙청과 사형을 당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비극

6·25전쟁의 피해는 참으로 참혹하였다. 소년병과 학도병을 포함한 한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민간인 250만 명이 사망하였고 전쟁고아가 10만 명, 전쟁미망인이 50여만 명,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이나 발생하였다. 그런데 7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전쟁의 그림자 속에 있다. 아무도 그림자를 과감히 거두지 못한다. 그림자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적당히 그림자 속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다.

전쟁으로 짓밟힌 생명과 산하들이 토해냈던 우주적인 고통과 신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수틀리면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세계의 정치인, 권력자들에게 전쟁고아들의 배고픔과 외로움, 절망과 상처를 보여주고 싶다. 전쟁미망인들의 한(恨)과 멍든 가슴을 보여주고 싶다. 상이군인들의 좌절과 불행을 말해주고 싶다.

조선의용대가 중일전쟁의 발발로 삼엄하기 그지없는 중국 관내에서 조선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조선인무장부대였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는 과거의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깨달음에 감사하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한국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미주

(미주 1) 안문석, 『무전평전』 (서울: 일조각, 2019), 138.

(미주 2) 앞의 책, 238. 간부뿐만 아니라 사변도 전체 21개 연대 가운데 47%인 10개 연대의 병력이 조선의용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박영실, 『8월 종파사건』, 81. 재중국 조선인들이 귀국해 조선인민군에 합류하여 6•25전쟁 개전당일 보병 21개 연대 중 47퍼센트인 10개 연대는 중국에서 온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

(미주 3) 안문석, 『무전평전』, 240.

(미주 4) 안문석, 『무전평전』, 241.

(미주 5) 정길현, 『미국의 6·25 전쟁사』 (서울: 북코리아, 2015), 65.

(미주 6) 브루스 커밍스 저, 김동노 외 다수 번역,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서울: 창비, 2019), 375.

 

참고서적

양수천·차철구 외 3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9
안문석, 『무전평전』, 일조각, 2019 
최삼룡, 『승리의 기록』, 연변인민출판사, 2015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 창, 2016
박영실, 『8월 종파사건』, 백년동안, 2014
정길현, 『미국의 6·25 전쟁사』, 북코리아, 2015,
김영범, 『윤세주』, 역사공간, 2013
감양주, 『항일투쟁반세기』, 료년민족풀판사, 1995
브루스 커밍스 저, 김동노 외 다수 번역,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창비, 2019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2권』, 인물과 사상사, 2017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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