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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의 오월을 기억합니다

기사승인 2022.05.19  16: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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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푸른 눈의 증인: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을 읽고

▲ 1980년 5월 광주를 회고한 책 <5.18 푸른 눈의 증인: 폴 코트라이드 회고록>의 표지 사진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로수는 정갈하게 서 있고 인도 위엔 사람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다. 아침인가? 아니, 저녁 무렵이라고 하자. 일터에서 있었던 일들 혹은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며 퇴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눈앞에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저 남성 역시 ‘집으로 가고 있겠지?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으로’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한 게 눈에 띈다. 자전거 뒷좌석에 기다란 나무상자가 실려 있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상자 한가운데는 끈을 돌돌 감아 자전거에 고정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다. 그냥 ‘짐’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 정체를 짐작한 순간, 퇴근하는 발걸음과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거리에서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관’이었다. 합판을 껴맞춰 급하게 못질해서 만든 좁고 기다란 관!

난 책 표지에 의미를 두고 보는 편이다. 한 줄의 제목이 책 전체 내용을 대표한다면 표지는 한 장의 이미지로 그 내용을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5.18 푸른 눈의 증인>의 책 표지가 된 사진 한 장이 깊게 와 닿은 이유도 그런 연유다. 자전거에 관을 싣고 가는 길 위의 시민과 길 위의 투쟁을 마친 시민의 모습이 겹치면서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모습이 느껴졌다. 광주와 그때의 사람들은 아물지 않은 상흔들로 여전히 깊고 아픈 고통을 겪고 있다. 과연, 저 관의 어둠으로 들어간 자는 참 안식을 얻었을까?

이 책을 쓴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 한국 이름: 고성철)는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전남 나주의 나환자 정착촌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카세트 음악을 듣고 달걀 넣고 끓인 라면을 좋아하던 그는 보통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노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라는 걸 빼면. 강원도에서 평화봉사단교육과 서울에서 정기건강검진을 받고 나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광주를 경유하면서부터 광주민주항쟁을 마주하게 된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현장들을 보면서 그는 많은 갈등을 했다. ‘관여하지 말고, 정치적 행위를 하지 말라.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지 말라. 손님으로서 당신의 위치를 손상하는 행위를 하지 마라’는 평화봉사단의 행동 가이드라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는 그가 광주의 역사에 관여하게 했고 기록하게 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조차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고립된 곳에서 그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의사들도 꺼려하던 나환자를 돌보던 그가 국가에 의해 한순간에 불순분자로 낙인찍히고 고립되어버린 광주를 돌보기 시작했다. 자국민에게 총을 겨누고 구타하고 폭도로 몰아가는 난국에서 그는 더 이상 나주의 나환자촌에 사는 평화봉사단원이 아니라 ‘광주 시민의’, ‘우리의’ 평화봉사단원이었다.

80년도에 나는 겨우 한 살이었고 광주 출신은 아니었으나 광주에서 한 시간, 나주에서 삼십 분 거리인 전남의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광주는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큰 행정도시였다. 영화를 보러 가거나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기 전에 쇼핑하러 가는 곳이었다. 물리적으로, 심적으로도 언제나 가깝게 여기는 곳이 광주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까지 정식으로 광주민주항쟁에 관해 배운 적은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말들을 주워 들었을 뿐이었다. “그때 동네 사람들하고 놀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데, 광주 근처에서 차를 돌려서 다른 길로 와야 했어. 나중에서야 알았지. 왜 그랬는지”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 계엄군이 광주를 다시 점령한 5월 27일 아침, 시위대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5.18 푸른 눈의 증인: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광주에서 한 시간 거리이다 보니, 중학교와 고등학교 선생님 대부분이 광주에 사는 분들이었다. 발령을 받아도 이사하는 것보다는 통근하는 게 나았으니까.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아침이슬’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노래를 같이 부르고 가르쳐 주시면서 대학생 때 참여했던 데모 이야기를 해주셨다. 고등학교 가서야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수학 선생님, 전교조 소속이었던 윤리와 철학 선생님, 국사 선생님으로부터 교과서에는 없었지만,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사건에 대해 조금 들을 수 있었다. 상세히 얘기해주셨다고 해도 내가 다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전남 지역 대부분이 그렇듯이 광주에 있는 대학교에 가면서 20대의 대부분을 거기에서 살았다. 매년 5월 17일이 되면 금남로 일대는 차량을 통제했고 하얀색 벽에 총알 자국이 가득한 전남도청과 그 앞 로터리 중앙에 있는 분수대 부근에서는 전야제가 열렸다. 대학교에서는 주먹밥을 나누면서 그때의 상황을 재현해보기도 했고 여러 추모행사를 했다. 그 시기는 전라도 어디든 그런 분위기였고 연고는 없어도 망월동 묘역에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일련의 행사에 몸만 참여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책을 읽는 내내 영상을 보듯이 생생했고 마음이 아렸다. 책은 1980년 5월 14일부터 5월 26일까지, 13일간 폴이 겪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폴의 몸과 눈을 통해 직접 겪고 보는 것 같았다. 울화통이 터지고 어찌할 줄 모르겠고 답답하고 그랬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종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하는 행위로 사건에 대한 솔직한 나의 목소리가 더해질 것이다. 문제는 당시 내가 목격했던 사건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는 그 역사를 내가 어떻게 전부 증언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꼈던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다행히 사십 년 전에 내가 목격한 것은 마치 오늘 일인 것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 프롤로그 중에서

그래서인지 어떤 때는 담담하기도 흥분하기도 하지만 추측성이 아니라, 직접 보고 체험했던 구체적인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1982년 한국을 떠난 후 미국에서 안과의사가 되어 아프리카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저명한 안과의사가 되었지만, 광주의 기억과 자신에게 지워졌던 짐의 무게를 잊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도 느껴졌다.

… 중간쯤에서 한 할머니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할머니는 약간 낡았으나 분홍색과 푸른색이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있었다. 길을 건너는 데 도움이 필요해서 내 손을 잡은 것으로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내 눈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자네 미국인인가?”
“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봤나?”
순간 나는 마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충격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 너무 안됐습니다.”
“그런 위로는 나중에 하고,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 주어야 하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네.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 주게.”
할머니의 말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목격한 이 사태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는 이미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고 마음속으로 이 소극적인 대답을 자책했다. 그 할머니의 단호한 눈빛과 꽉 잡은 손은 부탁이 아니라 의무를 지우고 있었다.
“잊지 말고 우리의 사정을 널리 알려주게.”
할머니는 다시 강조했다. …
도청으로 향하는 도로는 차단되었고, 군인들이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긴장은 시시각각으로 고조되었다. 작은 불씨만 있으면 일순간 불이 확 사방으로 번질 정도로 언제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 일곱째 날(5월 20일, 70-71쪽)

얘기했듯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역사의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 폴은 공책의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틈나는 대로 메모를 했다. 미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기도 했다. 급하게 휘갈겨 쓴 자신의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급박할 때도 많았다. 이렇게 기록해두었던 광주와 시민들, 그들을 때리고 죽이던 군인들의 모습이 광주항쟁 40주년(2020년)을 맞아 회고록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40년간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오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증인이 되어달라고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 폴 코트라이트, 주디 챔버린, 팀 원버그, 데이브 동림더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에서 인터뷰를 준비 중이다. ⓒ5.18기념재단 제공(위르겐 힌츠페터)
길모퉁이를 돌자 최루 가스가 훅하고 얼굴을 덮쳤고 도로 위에는 깨진 벽돌과 빈 최루 가스통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스타워즈>(폴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의 차림새가 스타워즈의 ‘스톰 트루퍼’ 같다고 했다-18쪽)의 경찰차 한 대가 불타고 있었다. ‘오, 이런!’ 격렬하게 뛴 상태에 두려움이 더해져서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 둘째 날(5월 15일, 28쪽)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군중 위로 비행기가 나타나서 최루 가스를 뿌리자 사람들은 공중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군인들이 무장하지 않은 대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고 있었다. TV는 악의적으로 조작한 내용을 방송했다. 광주의 봉기가 북한 불순 세력의 소행이라고 했다. 폭도 학생들이 공공 재산을 파괴하고 있으며 군인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평범하고 어린 학생들, 직장인들, 시골 농민들, 가게 주인들, 운전기사들이었는데. 바라는 것은 오직 정의로운 사회였는데. 수많은 시민이 군인들의 총알과 폭력으로 죽었는데!

“고 선생, 어서 여길 나갑시다.”
우리는 순천 가는 버스로 향했다. 막 버스에 올라타려는 순간,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네! 사람을 죽여!”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땅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군인 하나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노려봤다. 놀란 군중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군인이 소리쳤다.
“다들 비켜. 당장!” - 여섯째 날(5월 19일, 56쪽)

폴은 아홉째 날(5월 22일), 대형 시내버스 두 대, 승합차 한 대, 승용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보았다. 차량 여기저기에는 총알구멍이 뚫려 있었다.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광주로 올 때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버스였다. 그는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았으나, 어제 보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 (5월 22일, 105쪽)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있으면 안 되지.” - 열째 날(5월 23일, 113쪽)

“당신 같은 외국인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말했을 때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이미 우체국 앞에서 할머니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내가 만일 이곳을 벗어나 목격한 것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국 정부는 나를 추방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국을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5월 23일, 116쪽)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5월 23일, 124쪽)

“이 나이 든 여성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군인들이 헬리콥터에서 사격을 했어요.”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 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 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 열한째 날(5월 24일, 136쪽)

광주항쟁 당시 전남 지역에 근무했던 네 명의 평화봉사단 폴 코트라이트, 주디 챔버린, 팀 원버그, 데이브 돌린저는 영화 <택시운전사>로 잘 알려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도와서 곳곳을 다니며 통역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은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미국대사관의 말을 따르지 않고 광주에 남았다. 한국에서 추방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한 길을 택한 것이다.

▲ 시민들이 체육관 내부에서 매장하기 전 나란히 놓안 관을 향해 묵념하고 있다. ⓒ<5.18 푸른 눈의 증인: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그리고 폴은 이 모든 진실을 미국대사관에 알리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한다. 사방이 막혀서 광주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산을 넘고 넘어서 겨우 나주 호혜원에 도착했다. 다음날 택시를 타고 전주로 갔다. 가는 길목마다 군인들의 검문을 받아야만 했다. 청년들이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잡혀 있는 광경도 보았다. 그 역시 쉽지 않은 탈출이었다.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겨우겨우 바리게이트를 통과했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총의 섬뜩함은 오래 남았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군인들이 보이면 돌아올 겁니다. 당신 통역을 맡게 되어서 좋았어요. 여기 소식을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인 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개되었다. 이제 내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다. 나는 증인으로 책임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다. 사태를 목격하는 것과 그걸 기록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통역을 통해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기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관찰하고 기록해야 할 때와 개입해서 도와야 할 때 그리고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개입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 열두째 날(5월 25일, 158쪽)

폴이 당시의 노트, 편지, 사진 등 자료들을 꺼내 이 책을 쓰기까지 40년이 걸린 이유는 광주를 기억하는 일 자체가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일에 몰두하고 싶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2019년 5월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5.18과 관련된 수많은 진실이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 5.18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의 반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가 필요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자신보다 학식이 훨씬 뛰어난 많은 사람이 이 사건을 기록한 걸 알면서도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밝힌다.

첫째, 이 회고록을 통해서 서구인, 특히 미국인들이 이 사건에 관심 갖기를 원했다. 미국인들 중에서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광주항쟁 기간 중 워싱턴 주의 헬레네 화산이 폭발해 광주 소식이 미국 언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둘째로, 내게는 아직까지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심리적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는 회고록 집필 작업을 통해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020년이 5.18의 40주년이라는 것이 나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나는 사건이 일어났던 기간 동안, 또 그 후 이 사건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군인들의 끔찍한 행동을 목격한 후에는 그들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또한 나는 자신들이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받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 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182쪽)

군사독재에 맞선 많은 사람의 피로 얼룩진 그 날이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지만, 우리에겐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로 남아있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맞이하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나름의 추모 기간을 갖고 싶었다. 침착하자고 마음먹었지만, 분노가 일었다. 아직도 제대로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고하게 죽거나 처벌을 받았던 이들의 회복도 너무 더디다. 가해자인 전두환(대통령이라는 단어가 아깝다)은 어떠한 사과도 없이, 부인만 하다가 죽었다. 광주 법정에서 재판받는 내내 졸기까지 했다! 책임자 어느 누구도 진실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않고 여전히 꼭꼭 숨어 있다. 정의는 승리할 수 없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승리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건 누가 이기고 지는, 승패의 게임이 아니니까. 그저 왜곡되지 않고 올바른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불과 열흘 전에 나는 바로 이 도로 위에 있었다. 광주를 통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것이 마치 이번 생이 아닌 듯 느껴졌다. 그때 서울에서 오면서 보았던 나무, 농가, 절,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광주가 나를 이렇게 바꿔놓았다. … 고속도로에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군인들이 올라와서 승객들의 신분증을 모두 검사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청년 두 명이 밖으로 끌려 나갔다. 군인들이 그들을 땅바닥에 꿇어앉히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이미 십여 명의 청년들이 끌려왔는데, 일부는 수갑을 차고 있었다. 청년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순간 차 창문을 열고 소리치고 싶었다.
“여러분, 당당히 고개를 드세요. 광주 사람들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 열셋째 날(5월 26일, 178쪽)

42년 전, 마음속으로 외쳤던 폴의 목소리가 시간과 공간을 통과해 책 곳곳에서 들려왔다. 힘찬 함성이 되어, 따뜻한 바람이 되어 피로 물든 광주 땅을 어루만져주기를. 우리 마음속에 아주 작은 진실의 씨앗을 뿌려주기를.

▲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사망자들을 매장할 곳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 ⓒ<5.18 푸른 눈의 증인: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정리연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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