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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답고 복된 발

기사승인 2022.05.11  16: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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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권리 투쟁” 2022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4월호 ⑵

▲ 투쟁하는 장애인의 전동휠체어 바퀴에 향유를 붓고 있는 황푸하 목사 ⓒ옥바라지선교센터 페이스북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애인의 오빠는 장애인이다. 그와 결혼을 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장애인의 가족이 되었는데, 나는 그제야 장애인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장애인을 혐오하거나 그들의 권리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지 않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힘든 수술들을 견디며 자라서 그런지 남들보다 겁이 많다. 사람들의 눈치도 많이 보고, 작은 일에도 오해가 많으며 이해가 느리다. 이동이 어렵고 두려움이 많아서 그 쉬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기까지도 큰 소동을 치러야 했다.

내가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한 가족이 평생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들이었다.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홀로 견뎌내고 일어나야만 했을 것이다. 반면 계단 한 칸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었던 나는 누군가의 이동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는 누군가의 교육권에 대해서 고민한 적도 없었다. 나는 장애인의 가족이 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버스가 불편하면 타지마! 이동이 불편하면 집에 있으면 되잖아!”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예수의 제자들은 비어있던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울면서 무덤가를 지켰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시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결국 무덤가를 떠나지 못하고 시신을 찾던 마리아가 처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마리아는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된 것이다.

부활은 누가 볼 수 있는가? 빈 무덤을 보고도 돌아간 제자들이 아니라, 쉽게 돌아서지 못하고 무덤 앞을 서성이며 수시로 들여다본 마리아만이 부활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은 비장애인이 갈 수 있는 이 길을 장애인도 갈 수 있는지 언제나 살피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당장은 내일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절망스럽지만, 정의와 평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지 않고 연대하는 사람만이 부활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발은 어디로 향하는 발인가?

사순절 기간에 설교를 준비하던 나는 또 다른 이름의 마리아를 놓고 고민했다. 그 사람은 베다니의 마리아였는데, 그는 나사로의 여동생이었다. (나사로는 죽었지만 예수께서 다시 살린 사람이다.) 베다니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마리아가 한 행동으로 인해서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마리아가 갑자기 향유를 깨더니 그 향유로 예수의 발을 닦은 것이다. 그 향유는 마리아가 예수의 장례를 위해 준비했던 것이었다. 마리아는 유일하게 예수의 죽음을 준비한 제자였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가 걷고 있는 그 죽음의 길 앞에서 예수를 말리거나 외면했지만, 마리아는 그 죽음을 준비했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예수의 장례식 때 그 향유를 사용하지 않고, 유월절 엿새 전에 그 발 위에 부었을까? 생각해보면 마리아는 예수의 장례가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나사로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부활 신앙은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의 발이 실은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향해 걷고 있는 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아니라 향유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을 통해 그 길은 이제 죽음이 가득한 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부활로 인도하는 생명이 가득한 길이라고 마리아는 선언한다.

투쟁하는 장애인들이 떠올랐다. 보통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실제로도 내가 장애인 형님을 부축하며 이동을 할 때면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준다. 앞에서 문을 잡아주기도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군말 없이 기다려주기도 하며, 몸을 휘청거리면 당장이라도 달려와 잡아줄 기세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신경 쓰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참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만일 그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길을 가로막으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한다면,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하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장애인을 시혜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시선의 진실이 드러난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이동과 교육과 노동을 ‘권리’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이제 그 은혜라고 부르는 시설에서 탈(脫)하고자 한다.

오래된 그들의 투쟁 역사 안에는 상처와 고난이 참으로 많다. 시민들의 혐오와 비방은 물론이거니와 폭력과 위협이 난무하고, 경찰들이 그들을 진압하는 모습은 차마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할 만큼 잔인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위협과 조롱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장애인들의 시위가 출근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껏 듣지 않았던 것 같이, 소위 윗사람이라고 표현되는 이들은 더더욱 듣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억지로라도 빠르게 돌아가는 비장애인들의 일상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진실을 볼 수 없을 만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이 사회 안에서 그 진실을 봐달라고 세상을 멈춰 세우는 그들의 투쟁은 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밝히 보여준다. 그렇게 투쟁으로 만들어진 지하철의 엘리베이터들을 보라.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과 유모차를 끄는 사람들, 아이들과 노인들까지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수 있다

장애인 투쟁은 혐오와 조롱 속으로 들어가는 죽음, 그 죽음을 향한 발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부활, 그 부활을 향한 발이다. 할 수 없으니 오늘은 비장애인만이라도 사람처럼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오늘부터 장애인들도 사람처럼 사는 세상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시체 썩은 냄새 풍기는 죽음의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살자고, 그러니까 영원한 하루를 살아내자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권유한다.

나는 내가 하루라도 사람처럼 살고 싶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진정 살아있는 삶을 맛보고 싶기 때문에 장애인 권리 투쟁을 지지한다. “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발인가.” 베다니의 마리아가 모든 이들의 부활을 향한 예수의 발을 축복한 것처럼, “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바퀴들인가.” 우리 교회는 그 휠체어 바퀴에 향유를 부어 축복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 혐오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세상의 폭력과 차별로부터 지켜주시고, 그 복된 발이 가는 곳마다 정말로 거룩하게 하셔서, 결국에는 모든 혐오와 조롱을 이기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 그 부활을 우리 모두가 보게 해달라고, 진솔한 마음으로 다함께 기도하며 바퀴 위에 향유를 부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장애인 권리를 지지하고, 투쟁에 연대하겠다는 선언이고, 우리 교회가 부활에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차별이 없고, 평등한 세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이 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황푸하(새민족교회 담임목사) kncc@kncc.or.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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