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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면 거의 100% 아니야? 응, 아니야

기사승인 2022.04.08  16: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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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4

▲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100%가 된다는 말은 평등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평등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Getty Image

1.

제목에서 많은 분들이 짐작하실 텐데요. 이번 칼럼에서는 최근 사회적 핫이슈로 떠오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한 가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면, 전장연의 투쟁은 이동권, 교육권, 자립생활 권리 등 장애인 기본권 전반에 대해서 진행되는 투쟁입니다.

이미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니 그걸 간단히 짚어보려고만 해도 끝이 없을 테니까요. 이 글에서는 한 가지만 잡아 보려고 합니다. 그 한 가지란, 서울교통공사 관할 지하철/전철역엔 이미 엘리베이터가 94% 설치되어 있다는데 그러면 거의 100% 된다는 이야기 아니냐. 그런데 이동권에 관한 투쟁을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해 가면서 하는 건 명분이 좀 떨어지는 거 아니냐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에 대해서 장애학 연구자 한 분이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전철/지하철역 한 군데만 잡아서 거긴 비장애인 출입금지다 이렇게 하루만 한다고 해도 난리가 나지 않겠냐고요.

사실 이 비유도 약하게 한 거지요.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은 한 군데가 아니라 아직 20여 군데에 가깝고, 하루만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생길 때까지 적어도 몇 년은 출입금지인 셈이니까요. 그래도 어쨌든 이런 약한 비유로도 한 가지 드러나는 점은 있겠습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두고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한다고 비판이 많은데, ‘불편’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지금의 전철/지하철 시스템 자체가 장애인들의 불편(이라고 하면 약합니다만)을 구조적으로 깔고 만들어져 있다라는 점 말입니다.

2.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장애인 이동권 이슈를 바라보는 시선이 은연중에 갈라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요. 비장애인들은 주로 그 보장이라는 걸 ‘불편한 사람’들이니까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시선으로 보기 쉬운 반면, 장애인들은 동등한 시민이니 다른 시민들이 이동권을 누리는 만큼 자신들도 동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시선으로 본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러니 비장애인들의 시선에서는 100%는 아닐지 몰라도 94%면 거의 100%에 가까운 거 아닌가 그 정도면 노력하고 있는 거다 싶어도, 장애인들의 시선에서는 100%가 되어야지 비로소 동등한 건데 무슨 말이냐가 될 거라는 겁니다. 사실은 엘리베이터 100%라고 해도 ‘동등해지는’ 것도 아니고 ‘동등해지기 위한 시작’이기도 하겠고 말이지요.

더군다나 전철/지하철 말고 버스나 콜택시 같은 다른 교통수단은 아직 갈 길이 멀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연합뉴스의 한 기사가 장애인 활동가들의 집중 규탄 대상이 되었는데요.

한 장애인 국회의원이 장애인 콜택시의 현황을 설명하면서 2시간 이상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고 하자 연합뉴스가 대기시간이 2시간 이상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30분 정도가 대다수라고 팩트체크 기사를 냈습니다. 그러자 장애인 활동가들이 너도나도 그건 아니다. 30분은 택시콜에 응답이 오는 시간만 따진 거고, 응답이 안 와서 몇 번 취소했다 다시 콜했다 이러는 경우나 혹은 콜 응답이 되긴 되었는데 응답한 택시가 멀리 있다거나 이런 경우들이 빈발하는데 그런 건 하나도 계산 안 된 거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런 문제 다 없다라고 가정하면, 30분이면 괜찮은 걸까요. 여기에 대해서 한 전장연 활동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동권이란 30분 대기를 감수해야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원하는 시간에 맞춰 이동할 수 있는 기본권이라구요. 사실 이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동등한 시민이라면.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전장연의 투쟁은 이동권 뿐만 아니라 교육권, 자립생활(탈시설) 권리 등의 이슈를 함께 제기하고 있는데 이동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상관없는 이슈를 왜 엮냐 이런 말들이 있는데요. 이동권은 생활을 하고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 다른 이슈들이 상관없는 이슈라는 것도 어불성설이겠거니와, 장애인 운동의 역사를 봐도 그 전에는 잘 쓰지 않던 이동권이란 말을 동등한 시민으로서 이동할 권리라는 용어로 만들어 내고 나니 그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권리도 이야기해야겠다 이러면서 교육권, 자립생활, 노동권 등까지 계속 발전해 나가고 있기도 하지요.

다음으로는 이동권을 비롯한 장애인의 각종 권리를 실현하는데 예산의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말인데요. 물론 예산의 제약은 현실적으로 고려할 문제이긴 할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동등한 시민으로서 누릴 권리라는 차원을 기본적으로 생각한다면, 예산의 제약이라는 말이 그리 쉽게 나올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드는 거죠. 동등한 시민으로서 누릴 권리인데 아직 그게 안 된다면 예산으로 대유되는 사회적 조치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일 테니 말입니다.

3.

이 연재칼럼의 대주제가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인인데 이번 칼럼에선 주로 소수자를 이야기한 셈이고요. 이제 괄호 풀고 성소수자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교회 관련 공간에서 성소수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가끔씩 듣게 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실 성소수자를 볼 일이 별로 없어서 큰 이슈가 될 게 아닌데 성소수자에 반대한다고 말하건 성소수자에 연대한다고 말하건 교회 현장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요.

그런데 앞에서 장애인과 관련하여 이야기한 ‘동등한 시민’이라는 말을 여기서 ‘하나님 앞에 동등한 인간’이란 말로 바꾸어서 이야기해 보면 과연 ‘교회 현장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 동등한 인간이니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걸 전제하는 조직이 교회라면, 지금 성소수자가 별로 안 보인다고 성소수자 이슈가 교회 현장과 동떨어진 문제라는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물론 지금 당장 성소수자가 교회 나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성소수자를 볼 일이 지금까지는 별로 없었을 수도 있겠으나,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걸 전제하고 환대할 준비는 해 놔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지요. 물론 현실은 환대할 준비는커녕 반대할 준비도 아니고 반대하고 있는 교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만 …

알림

지난달 연재 칼럼 [성소수자라니요? 동성애자만 있는 거 아니었어요?] 중의 다음 문장을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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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트랜스젠더와 대조되는 말로 시스젠더란 용어가 있습니다. 지정 성별과 자신이 인지하는 성별이 같은 사람, 흔히 이성애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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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 "흔히 이성애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지칭합니다"라는 말이 필자의 실수로 잘못 들어갔습니다. 실수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황용연 대표(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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