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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떤 전능(全能)과 어떤 개입(介入)인가

기사승인 2022.01.27  23: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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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신학이란 무엇인가 ⑷

▲ Adolfo Pérez Esquivel of Argentina, 「Station 15: Triumph of Life」 (Stations of the Cross from Latin America 1492-1992) ⓒGetty Image

참여의 하느님(Dios Participante, 주체적 인간과 함께 하는)

열정적이며 정의롭고 분개하는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하느님의 속성인 전능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하느님은 자신의 전능(全能)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생각은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전능(全能)의 하느님이 전적(全的)으로 개입하여 인간의 역사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서구신학이 주장하고 있는 하느님의 전능(全能)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삶의 현실은 악화되어갔다. 서구신학은 신정론(神正論)을 통하여 하느님을 변호하였고 언젠가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해방신학은 하느님의 전능(全能)과 개입(介入)을 다른 개념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인간역사의 개입양식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의 참여와 헌신과 투쟁을 통해서 나타남을 보게 된다.

해방신학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투쟁의 현장에서 해방신학자들이 발견한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도하는 하느님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에 참여하는 하느님, 참여의 전능(全能)의 신이었다. 그들이 발견한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세상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 혹은 그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 인형 같은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자연의 역동성을 허락하신다. 인간을 조종하고 자신의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하느님은 진정한 의미의 신이 아니다. 참견하고 간섭하는 신은 성서적 하느님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의 현장에서 어디에 계시는가? 이에 대해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죽어가는 사람들, 처형당하는 사람들 아우스비치의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강제수용소에 갇혀 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 안에 계셨다. 아니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세계에서 발생되는 모든  비인간적인 사건들, 불의와  폭력으로 억압받고 죽어가는 사람들 안에 존재하신다.”

하느님은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 우리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신다. 우리의 악을 대항하는 모든 투쟁에 함께 하시며 함께 싸우신다. 간섭하거나 조정하시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시며 삶을 나누신다. 그는 자유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신이다. 그는 생명을 창조하고 회복하는 신이다. 그는 우리와 함께 자신의 삶과 운명을 거는 신이다. 그는 전능(全能)의 신이나  그러나 오히려 이 세계와 인간의 자유와 독립성을 위하여 기꺼이 그의 권력을 포기하는 신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도와 드려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은 모든 것을 다 하시는 신비스러운 전능(全能)의 하느님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인간들안에서 인간의 내부적 역동성과 의미 그리고 방향성을 창출해 내는 구체적인  하느님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자신이 조종하고 도맡아 하는 전능(全能)의 신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어쩌면 하느님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시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참여하신다. 우리와 운명을 함께 하신다. 그는 우리 옆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시며 모든 비인간적인 상황과 불의와 폭력을 대항하여 싸우신다. 그는 언제나 사랑의 전능(全能)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를 지탱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격려하시고 동행하며 참여하신다. 그러나 결코 우리를 철부지 취급을 하시지는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하도록 초청하신다. 그는 참여의 하느님이시다.

인간중심의 하느님(Dios andro-centrico)

참여의 하느님은 방관자는 아니다. 다만 그는 인간 중심의 하느님일 뿐이다. 그는 기꺼이 우리와 동행하고 우리와 함께 투쟁의 현장에서 싸우신다. 하느님은 마치 축구팀의 감독과 같다. 그는 모든 선수들의 자유를 존중한다. 축구 경기 내내 열정을 가지고 참여한다. 그는 선수들과 한 마음이 되어 열정적으로 축구 경기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스스로가 경기장에 뛰어들어 공을 차지는 않는다. 그는 결코 페널티킥을 차지 않는다. 결국 골을 넣어야 하는 것은 선수들이다.

해방신학은 모든 것을 다 하시는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인간들안에서 인간의 내부적 역동성과 의미 그리고 방향성을 창출해 내는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하느님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자유와 책임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자신이 조종하고 도맡아 하는 신을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No More God- Pilot!)

빌립보서 2:6~8은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는 최초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고백했던 하느님의 모습이 여기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들이 예수를 통하여 경험했던 하느님(신)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신)이었다. 최초의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를 통하여 경험했던 하느님(신)의 모습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사실 기독교의 핵심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제 하느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그 축이 옮겨 갔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왜 기독교인들이 세월호의 대참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하면서 기득권의 편에 서 있는가? 왜 성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그치지 못하고 있는가? 그들이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자리를 버리고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은 오늘의 시대에서 믿는 이들이 어떤 신을 믿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사람을 보자. 사람의 존엄성을 보자. 그리고 존귀한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을 보자. 차별금지법, 사람을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어떤 종교가 제일 좋은 종교인가?” 그는 대답한다. “당신을 매 순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종교가 제일 훌륭한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을 보다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보다 더 섬세한 사람으로,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 보다 더 사랑의 사람, 보다 더 인간적인 사람, 보다 더 책임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종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목회 현장에서 선포하는 하느님은 어떤 신인가? 우리를 좀 더 인간답게 살게 만드는 신인가? 아니면 우리를 더욱 편협하고 폐쇄적으로 만들어가며 신 중심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신은 아닌가?

하느님의 자리를 벗어나서 인간의 자리로 오신 성육신의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 중심의 신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신을 주장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믿으면서 마치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라는 것이다.(넬손 만델라)

하느님의 영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신다. 하느님의 영은 모든 생명들을 치유하시고 생기를 불어놓으시며 새롭게 하신다. 하느님의 영은 생명을 변화시키신다, 그리고 그 변화의 영은 모든 생명에게 새로운 생명력으로 다가선다. 하느님은 마법적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행위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 안에서 인간과 함께 하는 행위이다, 그는 인간 중심의 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해방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에 대해서 일단락을 맺는다. 코로나19로 여기 된 전환의 주제는 기독교 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해방신학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전환을 제안한다.

1. 하느님 중심(Theocentric)에서 인간중심(Anthropocentric)으로 전환
2. 폭력적인 하느님에서 평화와 자비의 하느님으로의 전환
3. 간섭-개입하는 하느님에서 선한 의도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의 전환
4. 공포의 하느님에서 사랑의 하느님으로 전환
5. 희생의 하느님에서 생명의 하느님으로 전환
6. 강요의 하느님에서 자유의 하느님으로 전환
7. 멀리 있는 하느님에서 우리 주위 가까이 있는 하느님으로 전환
8. 개인적 하느님에서 연대적 하느님으로 전환
9. 홀로 계신 하느님에서 삼위일체의 조화와 함께 함의 하느님으로 전환

지금까지 세 번의 글을 통하여 해방신학의 하느님에 대해서 말해왔다. 다음 글에서는 해방신학이 제안하는 예수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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