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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의 방식이 불러일으킨 파장

기사승인 2022.01.25  2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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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측을 벗어나는 믿음의 기적( 마태복음 8:5~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세계를 넘어 이방인의 세계로 펼쳐지게 된 것은 사도들 가운데 특히 사도 바울의 활동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은 그 놀라운 사건이 예수님 당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치유한 사건을 전하는 본문말씀은, 누가복음(7:1~10)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고, 조금 다른 형태로 요한복음(4:43~54)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뒤섞여 있는 가버나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데는 일치하지만, 그 주인공이 요한에서는 ‘고관’으로 되어 있는 반면 마태와 누가에서는 ‘백부장’으로 되어 있고, 그 주인공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게 한 인물이 요한에는 ‘아들’로 되어 있는 반면 누가와 마태에는 ‘종’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릅니다.

사실은 누가와 마태 모두 ‘종’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을 보면, 마태에는 ‘소년’으로 되어 있고 누가에는 ‘종’으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병행구절들이 그런 차이를 지니고 있고 전후문맥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당대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가운데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갔을 때 백부장이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절박하게 아룁니다. 백부장은 어떤 사람일까요? 당시 병사 백 명을 통솔하는 장교입니다. 아마도 로마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고 아마도 시리아인이었을지 모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집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절박하게 예수님께 호소한 까닭이 아들 때문이었다고 한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그저 소년이거나 종 때문이라고 한 까닭에 다소 갸웃거려지기는 하지만 그가 그렇게 절박하게 호소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쨌든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때문에, 당시 통념으로 볼 때 제국의 질서를 떠받치는 중요한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마주하고 있는 사건은 아주 이례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박하게 호소하는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헤아립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겠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곧바로 통한 것입니다. 신뢰의 상호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뢰와 신앙을 자꾸 구분하는 데 익숙합니다. 신앙은 신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신뢰를 기초로 합니다. 그것은 일방적 믿음이 아니라 상호간의 신뢰를 기초로 합니다. 백부장과 예수님의 대화는 바로 그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서 고쳐주겠다’는 말에 백부장은 깜짝 놀라 말합니다. 우선 감히 주님을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 어찌 ‘가서’ 고쳐주실 수 있겠냐 반문합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엄격하였던 당대의 질서와 통념을 반영합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자기 집을 방문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당대의 질서관념에 익숙한 주인공의 면모입니다.

그가 얼마나 당대 기존의 질서관념에 익숙한 사람인지는 그 다음 그 나름의 해법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 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 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번거롭게 자기 집에 가지 않고도 능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이 백부장의 예수님을 향한 놀라운 신뢰, 믿음의 표현이지만, 여기서도 그가 당대의 질서관념을 온 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이 말은 직역하면 ‘나도 명령하는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고…’라는 말입니다. 당대의 사람들이 엄연하게 구속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그 질서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께 나선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결론에 이릅니다.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선언하는 순간 그의 종이 나았다고 전합니다.

백부장의 믿음과 행동이 불러일으킨 극적인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의 믿음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 하나 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놀라운 믿음은 하늘나라의 잔치에 이르는 놀라운 사건을 초래합니다.

자, 다시 한 번 이 놀라운 사건의 의미를 곱씹어보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백부장은 어떤 사람일까요?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집단과 세력을 대변합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처럼 꼭 고관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백인부대의 지휘관이라 해서 그 역할의 비중이 약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군사력을 집행하는 한 책임자이니 제국의 질서 유지에 필수적인 인물입니다.

그것은 단지 지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질서로 유지되는 사회 안에서 향유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자기도 명령을 받드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기도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뿐이 아니라 그 지위에 어울리는 경제적 보상 등 여러 요건들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민중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결정적으로 결여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의미는, 그런 그에게도 결여된 것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자기가 향유하고 있는 삶의 조건 안에서는 충족되지 않은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절대적 빈곤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적 삶의 조건이 가장 절박하겠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충족된 사람에게도 명백히 결여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실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지만, 뭔가 결여된 것으로 갈급한 사람의 실상입니다. 백부장은 그런 사람을 대표하는지도 모릅니다.

▲ Paolo Veronese, 「Christ and the Centurion」 (1571) ⓒWikimediaCommons

중요한 진실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 그가 취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더불어 보여준 행동입니다. 앞서 말했듯 그는 자신의 지위를 결정짓는 사회적 조건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인인데다가 절대권력의 명령에 충실해야 하는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당대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그 질서 안에서 그 어떤 지위도 갖지 못한 예수님에게 다가서는 일은 쉽게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성큼 예수님에게 다가섰다는 것이 놀라운 사건입니다. 자신의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분과 계급, 지위에 매이지 않고 능동적인 주체로 나섰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신분과 계급, 지위에 매인 인간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 한계를 스스로 벗어버린 인간입니다. 상투적인 인간이 아니라 능동적인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어떤 지위나 신분 또는 계급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받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그 기대를 따라 살아간다면 어찌될까요? 그것은 변화 없이 따분한 지옥이 됩니다. 기업의 총수가 사회적 책임의식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소유의 절대권 유지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멸공’ 타령이나 하고 있고 유력한 정치인이 그걸 그대로 따라 하는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항상 빤히 예상되는 행동만 내보인다면 그 사람은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는 숨 막히는 세상이 됩니다.

기대에 부응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도 받아들여지지만,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질서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그 틀 안에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그 삶은 현실의 부조리에 기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부조리한데도 그에 대한 이의제기 없이 그 질서 안에서 순응하는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다면 세상은 결코 변화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공정’의 의미도 삶의 질서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고 주어진 그대로 용인하는 한계 안에서만 강조되고 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이 나타날 때 세상은 요동치고 변화가 이뤄집니다. 흥미진진한 천국이 됩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한 사회는 닫힌 사회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백부장의 그 놀라운 믿음과 행동을 보고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선포하셨습니까?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 잔치가 벌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분과 계급, 지위에 따라 질서 지어진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주할 때 그것이 곧 하늘나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하늘나라는 혈통으로 보장받는 것도 아닙니다. 동과 서에서 온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자리에서 함께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 기대되었던 사람들은 쫓겨날 것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선민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종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경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은 지금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새롭게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 길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대다수 사람들마저도 사실은 포장만 살짝 바꿨을 뿐 오늘 이 세대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현실에서, 그것을 거슬러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백부장의 믿음으로, 병으로 고통을 겪던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그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행동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헐뜯는 것으로 표몰이 하는 데 급급한 정치현실을 벗어나 정말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다투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오늘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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