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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져 열릴 이들을 바라며

기사승인 2022.01.11  15: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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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12월호 ⑵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와 조동연 신임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정치란 권력을 사용하여 삶에 질서를 함께 부여하는 행위로서, 심층적으로는 하나의 인간적인 기획이다. 마음이 부서져 흩어진 게(broken apart) 아니라 깨어져 열린(broken open) 사람들이 정치의 주축을 이룬다면,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세계를 위해 차이를 창조적으로 끌어안고 힘을 용기 있게 사용할 수 있다.
-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

11월 30일, 조동연은 더불어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발표가 나가고 세 시간 뒤 유튜브 동영상과 페이스북을 통해 그녀의 사생활 의혹이 불거졌고, 12월 2일, 3일 만에 그녀는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 글이 나올 즈음이면, 한 달이 지난 사건은 신속하게 묻힌 채, 촌각을 다투는 대선 후보들의 흥미진진한 관점 포인트들이 넘쳐날 것이다.

3일은 누군가에게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10년 생(生)을 복기하며 거친 세파에 넘어진 채 그 여진에 일어서지 못할 시간일 테다. 그 사이 상투적인 도덕과 윤리로 자행된 폭력은 누군가의 과거를 현재에 무한 재생하게 해놓고, 대중의 관심은 금세 다른 누군가의 과거를 무한 재생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선거철이 되면 각 당에서는 외부인사 영입에 열을 올리며, 신박한 정책을 전시하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다. 민주당이 조동연을 영입하면서 우주항공전문가, 육사 출신 군인, 30대 워킹맘이라는 상징성을 내세웠다. 이른바 시대적 코드에 맞춘 스타 발굴에 앞섰다는 자부심까지 느껴졌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사람을 선대위원장이라는 고위직에 추대하면서 정책적 역량을 내세웠지만, 실상 정당이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정책 역량이 아니라 정치적 상징성이었다. 그러니 정무적 책임에 검증까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다. 사건이 불거지고 사퇴 결정이 이어지자 민주당은 재빠르게 사건과 손절했다.

당이 내세운 여성, 엄마, 군인, 전문가라는 다층의 정체성은 불리한 상황에서 가장 고약하고 골치 아픈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정당의 인사 검증 실패를 지적하기 전에 정치권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단박에 드러난 것이다. 인간은 상징과 전시의 도구가 아닌데 말이다.

미디어는 사건에 쏟아지는 말들을 신속하고 자극적으로 노출했다. 클릭 수에 경제적 이득을 위해 경합하듯 달려드는 유튜버들이나, 국민의 알 권리를 핑계로 대중의 말초적 호기심을 끌어내 파헤친 언론이나 천박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무한 반복되는 보도 기사에 정당성과 객관성을 따지기 전에 저급한 댓글 잔치는 우리 사회가 이토록 윤리적이었는가(?)를 실감하게 했다.

굳건한 정상 가족의 신화와 고결한 사생활 의무에 대한 강조는 물론이고, 한 가정의 히스토리를 낱낱이 퍼 나르는 미디어와 대중의 행태에 작금 우리는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가’를 알 만큼 너무나 살가운 공동체구나라는 생각에 실소를 머금게 했다. 정치든 언론이든 대중이든 인간에 대한 존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쏟아진 이혼 사유에는 잔인하도록 가혹하면서도, 군대라는 권위 조직에서 불거진 성폭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넘어가기에 바쁘니 말이다. 최근 군대에서 일어난 성희롱, 성폭력 사건들이 오버랩 되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정작 비판하고 개혁해야 할 곳에는 침묵하고, 보다 중요한 일을 향해 사건은 사건으로 덮고 개인사는 개인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우리는 그렇게 관대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낙인찍기는 대중의 몫이고, 그 결과는 개인의 몫인 셈이다.

정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자 힘이다. 예수의 삶이 깨어져 부서진 듯해도, 실패한 운동으로 사그라지지 않고 새로운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살려내려는 그의 마음, 다시 말해 사람들의 비통한 마음을 끌어안고 다양한 차이에 귀 기울였던 그의 태도에 있었다. 그것이 파커 파머가 말한 깨어졌으나 새롭게 열어가는 가능성인 것이다.

여인을 빌미로 예수를 고발하려 했던 바리새인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 8:7)는 예수의 요청은 여인을 도구삼아 타인을 무너뜨리기 위해 몰려온 이들의 마음에 틈을 냈다. 그들 역시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 속에서 비통한 마음을 지닌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여인과 마주했다.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리고 그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모든 이들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 기존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부단히 자기 자신을 넘어 가치를 생성해가는 존재는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를 둘러싼 안정적 기반에 기대어 공유된 도덕의 틀에 따르는 사회적 존재이기 쉽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퍼진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 내면의 분노와 공허함을 집단적으로 분출하기보다는 서로에 비통한 마음을 살펴보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지금은 판단을 유보하고 타인에게 겨눈 잔인한 무기들을 내려두고 서로의 부서진 마음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를 인정하고 상대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다음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송진순(NCCK신학위, 이화여자대학교) kncc@kncc.or.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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