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죽음을 넘어 조선 선교를 향한 열정

기사승인 2022.01.01  15:57:01

공유
default_news_ad1

- 밀알이 된 데이비스와 맥켄지 선교사의 내한과 죽음 ⑶

▲ 「Sorae korea church」 (1895) ⓒWikipedia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최초의 한국 선교사 데이비스

여러 장로교파들이 연합하여 1859년에 형성된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는 당시 한국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한국행은 순전히 그의 개인적인 결단과 그를 후원하기로 한 그의 모교 장로교 친교회와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의 열정과 신앙고백의 산물이었다.

1885년 영국교회선교협의회 울프(John R. Wolfe) 감독은 영국과 호주의 지원으로 두 명의 중국인 사역자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코페 주교가 영국성공회의 선교를 서울과 제물포에 국한하게 되자 울프(John R. Wolfe) 감독은 재정 감소 등의 문제로 부산에서 철수하게 되었다.(1) 그러나 1887년 그는 부산 선교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기를 영국교회에 촉구하며 문제 해결을 위하여 부산 방문기와 한국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호주의 매카트니 목사(H. B. Macartney)에게 보냈다.

매카트니 목사는 그의 글을 자신이 발간하는 선교 잡지에 ❮차이나에서 온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다.(2) 데이비스는 울프 감독의 글을 읽고 한국 선교에 대한 소명에 불타올라 인도 선교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당시 호주교회는 원주민 선교, 중국 이민자 선교와 뉴헤브리데스 선교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한국선교에 대한 소명과 선교적 책임감으로 기도하고 있는 호주청년회에 맡겨야 했다.

데이비스는 1856년 뉴질랜드 왕가레이에서 태어났으나 1860년에 가족이 호주의 멜버른으로 이사하게 되어 호주 인으로 성장하였다. 그가 12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지만 플리머드 형제단의 일원인 그의 가족들의 두터운 신심으로 그는 여전히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3) 1876년 멜버른대학 재학 중에 인도에서 2년 동안 사역을 하였으며 돌아와서 대학교 졸업하였다.

그 후 멜버른 스코필드 중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울프 감독의 글을 읽고 한국 선교의 소명을 받았다.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해 성공회에서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을 하였다. 멜버른노회는 그가 에딘버러에서 6개월간 신학 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한 후 목사 안수를 받는 조건부로 그의 이적과 제안을 수용했다.(4)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1889년 10월 2일에 누나 메리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였고 10월 4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으며 5일에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헤론과 스크랜튼 부인의 따스한 환대를 받았으며 5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학습하였다.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서상륜 등과 과천, 수원, 용인 등 서울과 인접지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890년 3월 14일에 마음에 품었던 부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한국어 교사와 함께 한문성경, 전도지, 판매용 마가복음, 요리문답서 등을 가지고 걸어가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다.(5) 그는 수원, 공주, 전주를 거쳐서 섬진강유역을 지나 하동으로 갔다.

오늘날 한국인도 어려운 20일의 한국 종단 도보 여행은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관심, 배우고 이해하고자 하는 선교적인 마인드에서 비롯되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며 복음도 전하고 한국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두 분으로 보려는 그의 계획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멋진 계획이었다. 복음전파와 한국을 보다 많이 보다 깊게 체험하려는 그의 열망은 식사와 숙소, 도로 상황과 기후를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 그는 체력이 소진되었다.

피로와 영양부족에 시달린 그는 부산 인근에서 비를 흠씬 맞았으며 감기에 걸렸다. 감기는 급성 폐렴으로 악화되었고 그는 게일 선교사에 의해 곧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는 1890년 4월 5일 그가 울프 감독의 글을 읽으며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열망하였던 부산 땅에서 천연두와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캐나다장로교의 최초 한국 선교사 맥켄지

맥켄지 선교사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온 일군의 캐나다 선교사들이 있다. 1888년에 선교사 중 한국학의 선구자인 게일(James S. Gale), 1889년에 한국 침례교의 선구자인 펜윅(Malcom C. fenwick)이 한국에 들어왔다. 뒤를 이어 1890년에 원산부흥운동을 촉발시킨 하디(Robert A.Hardie)가, 1891년에 홀(William James Hall)은 처음부터 미감리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으며 청일전쟁의 마당이 된 평양지역에서 밀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중에 전염병에 감염되었으며 과로와 피로의 누적으로 죽었다. 애비슨(Oliver R. Avison)은 1893년에 제중원에 부임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교적을 남감리교선교부, 북장로교선교부로 적을 옮겼고 펜윅은 ‘동아기독교회’를 설립하여 캐나다장로교에서 이적하였으므로 캐나다장로교 교단에서 탈락하였다. 그리하여 교단의 후원 없이 독립 선교사로서 개인의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 온 맥켄지가 캐나다장로교의 최초의 선교사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캐나다장로교의 공적인 파송으로 온 선교사를 의미할 때는 그의 뒤를 이어서 들어온 그리어슨(Robert Grierson), 맥레(Duncan M. McRae), 푸트(William R. Foote)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캐나다장로교에서 온 최초 한국 선교사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구자인 그의 특별한 죽음으로 캐나다장로교 안에 한국 선교에 대한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3년이란 긴 논쟁 끝에 메리타임연회에서 한국 선교를 반대하는 안건이 111대 25로 부결되었으며(미주 6) 곧 바로 이어서 3명의 선교사들이 임명되는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맥켄지는 1861년 7월 15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달하우지대학과 장로회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가 재학시절 장로회대학 학생선교협의회가 래브라도 선교를 받아들이자 그는 래브라도 해안에 선교회를 설치하고 사역을 책임졌다.

1887년 노스필드에서 열린 세계학생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세계 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가슴에 품고 돌아온 그는 래브라도에서 1년 반 동안 심혈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그 해안을 여행하며 노스필드선교대회에서 가져온 한국 관련 자료들과 소책자를 읽었다. 그는 소책자를 읽으며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품게 되었고 한국 선교가 자신의 소명임을 확인하였다.

그 후 신학교로 돌아가 마지막 학기 강의를 듣고 졸업하였으며 스튜악케에서 2년 동안 목회를 하였다. 그는 목회를 하는 중에도 한국에 갈 방법을 계속 고민하였으며 여러 개인들과 단체들로부터 한국 선교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마침내 그는 스튜악케 목회를 사임하고 의료공부를 하며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0월 26일, 투르로 교회 회중들의 격려를 받으며 밴쿠버로 향하는 기차를 탔고 11월 12일 밴쿠버에서 한국행 배를 탔다.

맥켄지는 일기에 당시의 느낌을 적었다.

나는 배에 발을 디디면서 나의 땅을 떠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내 모국 캐나다에 머무는 것은 어떤 희생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한국이 내가 받아들일 땅이 되게 해주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며 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삼킬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큰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내 유골을 그들과 함께 썩게 하소서.(7)

1893년 12월 18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모펫(S.A.Moffet)의 소개로 1월 3일에 소래마을로 내려갔다.(8) 그는 소래마을 사람들에게 따스한 환영을 받았으며 4월 23일에 서울로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였을 선교사들은 평양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문제로 뒤숭숭하였다. 선교사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밤낮으로 모여 기도하며 협의를 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모펫과 함께 선교사 대표로 뽑혀 평양 방문을 하였다. 그는 평양에서 투옥당하거나 고난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서 위로하고 6월 3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조선정부가 청나라 군인을 요청하자 천진조약을 근거로 해서 일본군인이 조선에 들어오며 전쟁의 소문이 돌았다. 맥킨지는 전쟁의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물포에 갔다. 그는 9월 까지 제물포에서 헤버 존스와 함께 지냈으며 한국인들, 영국과 미국의 선원들과 함께 일을 하며 지냈다. 그는 9월에 소래교회 지도자인 서상륜에게 소래로 돌아오라는 간청을 받고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가지고 온 선교비가 270달러로 줄어있는 것을 확인하며 서상륜의 간구대로 소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1895년 6월 2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래를 떠나지 않고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소래에 머무는 내내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소요 속에서 살았다. 동학도들이 장연읍성을 공격했고 군수와 양반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동학군 지원병으로 끌어갔다. 동학도들이 그리스도인들과 서경조와 맥켄지를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1894년 12월 12일 맥켄지는 소래교회에 성 조지의 십자가 깃발을 높이 세웠다.(9) 그 깃발을 보고 동학군들과 동학의 지도자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도피하지 않고 그들을 맞이하였으며 깃발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평화의 깃발이라는 설명에 동학도들은 구원의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하였고 자문을 구하기 위하여 그를 계속 찾아 왔다. 이후, 장연 동학도들의 깃발에서 척왜만 남고 척양은 사라졌다.(10) 그의 용기와 설득으로 소래는 동학도들에게 침공당하지 아니한 유일한 마을이 되었다.(11) 그리하여 소래교회에는 동학도까지 모여들었다.

처음 그가 소래에 갔을 때, 세례를 받은 두 명의 성인과 아이 한 명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였기 때문에 교우들은 교회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맥켄지는 3월에 건축을 시작하여 그가 죽기 2주 전인 6월 9일에 신축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 의하면 그가 처음 소래에 도착했을 때는 세례 받은 두 명의 어른과 한 명이 아이가 있었으나 교회당이 완성된 무렵쯤에는 70명에서 100명의 사람이 주일과 수요일 밤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약 이십 가정이 주일을 지키며 기도생활을 하고 또한 모두들 식사기도를 드린다고 하였다. 그는 미션스쿨을 시작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교사들의 월급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그의 일기는 그가 말라리아와 일사병 등과 같은 증세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지막 일기장에 아래의 글을 남겼다.

…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 겠다. 조금은 나은 듯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갑자기 찾아 왔다. 교회 봉헌을 일주일 앞둔 6월 24일 주일예배 후,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교인들은 자기들 곁에 와서 주님처럼 살며 사랑했던 선교사에게 일어난 비극으로 망연자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맥켄지 선교사의 사랑과 위대한 희생을 알고 있었다.(13)

미주

(미주 1) 에디스 커·조지 앤더슨, 양명득 번역,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 역사 1889-1941』 (동연, 2017), 44.
(미주 2) 김명구, 『한국 기독교사 1 - 1945년까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163.
(미주 3)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군산시기독교연합회전킨기념사업회, 2018), 43.
(미주 4) 김명구, 163.
(미주 5)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44.
(미주 6) 윌리엄 스코트, 연규홍 번역,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100.
(미주 7) 윌리엄 스코트, 83.
(미주 8) 맥켄지의 소래마을 도착 일이 스코트가 쓴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에는 1월 3일로, 김명구가 쓴 『한국 기독교사 1 - 1945년까지』에는 2월 3일로 기술되어 있다. 전자가 음력으로, 후자가 양력으로 계산된 것이면 문제가 없다. 
(미주 9) 김명구, 167.
(미주 10) 김명구, 169.
(미주 11) 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7), 162쪽.
(미주 12) 김명구, 169.
(미주 13)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88; 도리스 그리어슨 엮음, 연규홍 번역,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275-276.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