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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켄지 선교사의 죽음과 캐나다장로교의 반응

기사승인 2021.12.18  15: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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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알이 된 데이비스와 맥켄지 선교사의 내한과 죽음 ⑵

▲ 윌리엄 맥켄지 선교사 ⓒWikipedia

맥켄지(William McKenzie)는 1893년 12월 15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1895년 6월 24일 소래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마지막 일기에 “영어로 말하지 않고 백인도 보지 않은 채 소래에서 여덟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하루도 아프지 않았습니다.”라고 적었다.(1) 그리고 아주 힘들게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단 하나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하십니다.
어머니 … 이제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너무 아픕니다.(2)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 하지만 식지 않는 선교에 대한 열망

맥켄지의 죽음은 많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특별히 던칸 맥레 목사는 맥켄지의 영웅적인 믿음과 열정에 깊이 감동을 받아 키드스턴 섬의 등대로 가서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한의 사람들의 나라에서 맥켄지를 대신하러 갈 것”을 결심하였다.(3)

캐나다장로회 총회 위원이자 「프레스비테리언 위트니스」의 편집장이었던 머레이 목사는 맥켄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의 교회는 기꺼이 교회가 줄 수 있는 모든 도움과 자금을 가지고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적합한 누군가가 되도록 빨리 맥켄지가 떠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 한국에 발을 디디길 바랍니다.”라고 한국 선교에의 열망을 표현하였다.

그의 죽음의 소식은 또한 메리타임 지역의 교회가 맥켄지의 사역을 계승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해외선교위원회는 선교회가 지고 있는 빚 때문에 한국 선교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1986년 4월 회의에서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서 활동한 맥켄지의 선교사업을 계승하자는 안건에 대하여 투표를 통하여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위원회는 만약에 서부 분과가 한국 선교를 떠맡으면 맥켄지가 한국에 남겨둔 2,000불 정도의 토지와 그가 후원자들에게 약속받은 매년 1,000불의 후원금을 3년 동안 그들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내용을 총회에 보고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 결정은 6월 총회에 보고되었고 총회는 해외선교위원회 동부분과의 결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11월, 총회의 해외선교위원회의 보고서가 알려진 후, 로브(A. E. Robb)가 「테올로그」에 한국 선교 호소문을 썼다. 그는 맥켄지의 삶과 죽음, 그리고 한국 선교를 위한 맥켄지의 유산 2,000불에 언급하며 메리타임 지역 교회는 총회와 해외선교위원회에서 거부한 한국 선교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선교에 요청되는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소래 교회가 캐나다장로교에 보낸 편지(4)를 자세히 소개하였다.

우리는 맥켄지 목사의 친구요 동역자이며 형제이신 여러분께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어주시고 또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맥켄지 목사님이 한국에 오신 후, 그분은 황해도 장연의 소래 마을로 내려오셔서 열심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업을 하시며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소래 마을은 늘 악한 요소가 많은 곳이었고 축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맥켄지 목사님의 본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위리와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캐나다에 계신 우리 형제들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교인 교사 한 분을 보내주시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래의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의 이름으로
서명 : 서경조
한국 황해도 장연 소래 마을로부터
1895년 12월 26일

소래교회의 편지가 알려져 한국에 대한 관심이 교회를 통해 다시 확산되었다. 「위트니스」 지(紙)는 찬성하는 자의 주장에 대하여 “장로회 교인 중에 어떤 사람도 한국이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된 관심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한국으로 봉사를 떠나기 위해 지원했다. 또한 한국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10배 이상으로 할 일이 많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썼다.

그리고 반대하는 자들의 의견을 ‘현재 활동 중에 있는 선교회를 지원하는 것이 “최우선의 일”이며 현재 한국 선교를 지망한 두 학생은 미국 선교부에 소속되어 있고 맥켄지의 유산은 그들에게 제공하면 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메리타임지역의 교회들은 한국선교 찬반에 대한 논쟁을 다시 벌이게 되었다.

소래교회의 편지는 캐나다장로회 교회들과 여신도들을 감동시켰으며 특별히 메리타임지역 부인여성해외선교위원회를 움직여서 일파만파의 한국선교의 물결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죽음

데이비스는 최초의 호주 선교사로 맥켄지는 최초의 캐나다장로교 선교사로 한국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들은 후원자들과 자신들의 기도와 염원대로 피땀을 흘리며 씨앗을 채 뿌리기도 전에 급성폐렴과 일사병으로 죽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가장 불행한 죽음인 ‘객사’를 한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한국이나 그들의 교회에서도 은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이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힘든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그들의 후원교회에서 충직한 종의 생명을 책임져주지 않는 무능한 하나님에 대한 절망과 분노, 불신과 거부가 나타날 수 있었고, 아니면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회의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무모하게 행동한 열광주의자들로 매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의심받지 않았으며 그대로 한국선교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다.

미주

(미주 1)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연규홍 번역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87.
(미주 2) 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162쪽,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7
(미주 3) 던칸 선교사는 캐나다장로교가 공식적으로 파송한 최초 3인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 맥켄지 선교사와 동향이었으며 같은 대학교 출신으로 친한 동료이었다. 헬렌 F. 맥레저, 『팔룡산의 호랑이』,  연규홍 번역(한신대학 교출판부, 2010), 38.
(미주 4)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93-94; 김명구, 『한국 기독교사 1-1945년까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170.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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