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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혐오의 연쇄를 무엇으로 끊을까

기사승인 2021.11.28  15: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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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을 비춥시다(누가복음 8:16-17)

▲ 빛을 가리는 것은 빛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Getty Image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대림절 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림절이라고 하면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기간, 어둠이 걷히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기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림절이 기다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절기라는 점, 대림절 기간은 달력상에서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이라는 점,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요한복음의 고백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림절 기간에는 보통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게 됩니다. 성탄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이제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아마 11월에 정부의 위드코로나 정책이 발표되면서 대림절을 준비하시던 많은 분은 이런 말씀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코로나 시대가 끝나고 다시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대림절에 예수님께서는 코로나 시대가 끝났다는 새 희망을 주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들을 준비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 코로나 확진자 수는 하루 4천명을 넘어섰습니다. 지난 한 주간 평균을 살펴보았을 때, 사망자는 하루에 35명이었고, 위중증환자는 575명이었습니다. 최근 이슈된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는 백신마저도 무력화시킨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은 다시금 국가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여전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만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저는 대림절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말은 지금 이 시대가 어둠 속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가올 희망을 이야기한다면, 지금은 절망 중에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가올 희망을 기다림과 동시에 지금 시대의 어둠과 절망을 함께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대의 어둠

시대의 어둠을 이야기하자고 하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주고 있는 코로나 사태를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이 시대의 아픔이고 많은 이들에게 절망을 안겨준 사태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사망으로 규정된 사람만 대략 520만 명입니다.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는 사태이기에 코로나를 이 시대의 어둠을 만들고 있는 요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어둠은 코로나와 같이 외부 환경에 의한 요인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감춰진 어둠입니다.

저는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어둠, 우리 안에 감춰진 어둠은 혐오 풍조와 그 안에 담긴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이 집단을 개인이 개인을 혐오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 속에 너무나 많이 퍼져있습니다. 이런 문화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역감정이라는 틀 속에서 영남과 호남이 갈라져 서로를 혐오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역감정은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남과 호남 사람들이 서로를 왜 미워해야 하는지도 지금은 조금 애매하게만 느껴집니다. 솔직히 저희 또래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에 휩싸일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한데, 대학 시절 아는 누나가 저와 동갑인 여자아이와 약간의 갈등을 겪으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래서 전라도 애들은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누나는 부산 출신이었고, 제 또래 아이는 목포 출신이었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왜 믿으면 안 되냐는 제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그냥 그렇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마음속에 새겨졌고 누군가와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 이유를 출신 지역으로 돌리게 된 것입니다. 개인들 간의 갈등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그 사람의 출신 지역을 향한 혐오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지금 시대에 보이는 혐오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혐오에 뭔가 이유를 붙입니다. 저들로 인해서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렇기에 저들을 혐오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감정의 충돌 또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고, 그 충돌로 인해 상대방과 그 상대방이 속한 집단을 혐오하게 됩니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서 혐오가 시작되는 이유를 단편적이나마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노입니다. 사람들은 뭔가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노를 혐오라는 방식으로 표출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여기는 대상과 집단을 향해 혐오를 표출합니다.

그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면, 현재 10-20대 남성들이 제기하고 있는 병역 문제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 가고 싶어서 가는 남성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에서 어떤 이유가 있다면 군대로 도망가려는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은 의무 병역에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갔을 때도 똑같았습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아서 자료를 찾아보니 제가 2003년도에 병장으로 근무할 때 받았던 월급이 23,000원이었습니다. 정확한 월급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속해 있던 부대는 반년에 한 번 휴가를 나올 수 있었는데, 휴가 나올 때면 대충 10여만원을 가지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즘 병장 월급이 50만원인데다, 부대에서 휴대폰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들과 비교하자면, 월급으로 2만원씩 받으면서 군생활을 한 저희 세대들, 더 올라가서, 70년대에 천원에서 3천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고, 80년대에는 4천원에서 8천원, 90년대에서야 만원이 된 월급을 받으며 군생활을 했던 세대들은 당연히 우리나라의 징병제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저희 세대까지도 징병제에 대한 불만과 반감은 있었지만, 이로 인해서 여성 집단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여성들도 군대에 보내야 한다거나 여성들 때문에 남성들이 군대에서 고생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국방부를 욕했으면 욕했지,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으면 했지, 이것이 성별 갈등으로 이어지진 않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군 문제는 성별 문제로까지 이어집니다. 왜 남성들만 군대에 가야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졌고, 올해 초에는 여성들도 징병해달라는 국민청원도 있었습니다. 이 청원이 4일 만에 20만명의 동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습니다.

국방부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부실한 식단에 대한 불만, 여전히 존재하는 군내 부조리 문제는 항상 지적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국방부가 하는 게 항상 그렇지’하는 식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은 여전히 성별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10-20대 남성들이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국방부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상하게도 여성을 향해 분노합니다. 요즘 10-20대 남성들이 현 정권을 미워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평등을 강조하는 정부이기에 싫어합니다. 이 정부로 인해서 피해를 받았다고 여깁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한동안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할 곳을 잘못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이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려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이들의 분노와 혐오 뒤에는 이를 조장하고 혐오할 대상을 왜곡시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마치 과거에 어떤 이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겨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지금 시대의 가장 큰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지역감정이 가장 큰 혐오의 형태였다면, 지금 시대 젊은이들에는 성별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그 갈등과 분노와 혐오를 조장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하며 어렵기에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해야 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서로 혐오하며 서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빛을 보게 하라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마가복음 4장에도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보다는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소금과 빛의 비유가 더 익숙하실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셨던 말씀은 오늘 본문 16절에 나타난 말씀일 것입니다.

간단하게 보자면, ‘등불을 감춰두는 이는 없다. 등불은 빛을 밝힐 수 있는 곳에 두어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춘다’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 또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저마다 해석해서 복음서에 첨가문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를 다양하게 해석했기에 지금 우리도 이 말씀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빛을 비춘다는 것이 복음 전파의 사명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빛이 비춰진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종말 때를 기다리는 이야기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같은 말씀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와 비슷한 맥락을 말씀을 알고는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시는 분이라고 해석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본문이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여 전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분명 제자들에게 어떤 사명을 전달하신 이야기입니다. 이런 해석은 마태복음 5장에 잘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이 아닌 누가복음의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 17절 말씀 때문입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그렇기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역할을 모두 예수님께로 돌리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의 등불이 되어서 세상의 감춰진 어둠을 드러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그저 기다리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을 비추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 빛을 우리가 세상에 비추길 다짐하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를 실천하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앞서 지금 시대의 어둠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개신교 내부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어떤 집단을 지정해서 그들에게 분노하고 혐오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개신교 내부에 있는 어둠은 계속해서 감춰나갑니다.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런 모습은 쉽게 찾아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목회자 분들과 자주 접하기 때문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을 사회생활 하는 친구들보다 교회에서 더 많이 들어왔습니다. 우리 내부의 잘못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덮어버리고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외무의 문제에만 득달같이 달려들어 정죄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번 대림절, 2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코로나 사태의 아픔 속에서 보내는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가 먼저 분노와 혐오의 연쇄를 끊어냈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의 고리를 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로 빛으로 인해 세상의 어둠이 드러나고 그 어둠이 빛으로 가득하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시며 세상을 밝게 비추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이 일을 감당할 힘을 주시고, 그에 합당한 은혜와 복을 내리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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