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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살인

기사승인 2021.11.27  15:3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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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외에는 그 어떤 것도(출 20:16; 시 27:1; 마 14:55; 잠 24:28)

▲ 1964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구속된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도예종·박현채(앞줄 맨 오른쪽과 둘째), 박중기(뒷줄 왼쪽 둘째) 등 12명이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았지만 ‘인혁당’의 실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1975년 4월 8일 39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상고는 기각되었고 24시간도 채 못 되어 8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이 8명은 소위 ‘인혁당’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인혁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건설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간첩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었다는 것입니다. 인혁당은 그 후 거의 지하에 잠복해 있는 상태이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동을 강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제2의 사일구로 사회혼란을 조성,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들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되었습니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갖가지 죄명이 붙여진 채 기소되었습니다. 인혁당 관련자 21명에 대한 세 번의 재판을 거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 7명에게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1975년 4월 9일 위 7명과 학원 관계자 여정남 이렇게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그 당시부터 그랬고 요즘에 와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허구였습니다. 각종 허위 증거와 거짓 진술을 바탕으로 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던 한국 사법사의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재판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독재 정권 시의 수많은 공안사건은 거짓증거와 거짓 증언이 어떻게 한 사람 혹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역사를 왜곡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사는 이 같은 거짓증거와 증언에 의한 역사 왜곡 현상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거짓증거와 거짓 증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세 사람이 한 사람 바보 만들기는 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몇 사람이 작당하고 거짓 증언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믿게 됩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오늘의 제9 계명은 바로 이러한 거짓 증언이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증언의 폐해는 요즘만의 일이 아닙니다. 시편 27편에서 다윗은 거짓증거로 인한 고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원수들이 지키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거짓으로 증거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나를 원수의 뜻에 내 맡기지 마십시오.”(시편 27:11~1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형 언도를 받는 데에서도 거짓증거와 거짓 증인들의 힘은 매우 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함에 의한 죽음이었다고 말을 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모함에 의한 거짓 재판은 재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제9 계명은 이러한 거짓증거와 거짓 증언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이 거짓으로 남을 해하는 일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짓 증언의 폐해는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요?

먼저, 거짓 증언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인 면에서부터 파괴시켜 나갑니다.

거짓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가장 황폐하게 만듭니다. 거짓말을 하다 보면 자신의 삶의 기초가 무너지게 되어서 자신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정신적 분열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갈등과 고민에 사로잡히게 되어 괴로운 나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의 평화를 파괴합니다. 그는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많은 공안재판에서 거짓 증인으로 등장 되었던 사람(강제로 그랬던 혹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던)들이 실제로 많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정신병에 걸리기도 하고 마약중독자도 알콜 중독자가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허무하게 보낸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그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자실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모두 거짓 증언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게 된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겠지요.

거짓 증언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증거는 그들 가운데 양심선언자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을 했던 사람 중, 몇몇은 그것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그만 자신이 거짓 증언을 했다는 것에 뒤늦게나마 양심선언을 합니다. 양심선언을 한 후 이들이 하던 첫마디는 ‘시원하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으로 인하여 괴로운 인생, 숨 막히는 인생을 살아왔으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거짓 증언이 습관화 된 사람들입니다. 거짓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는 것이 생활화 된 철저히 파괴된 인생, 회복할 수 없으리만큼 거짓이 몸에 배인 사람들입니다. 거짓 증언을 되풀이 되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자리에까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참담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은 우리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철저히 파괴시켜 나가는 무서운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짓 증언은 반드시 의도적으로 행하는 거짓말만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거짓증언은 의도가 없는 유언비어 혹은 무심코 던지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의도성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부정확한 정보에 의한 나의 말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불신의 사회로 만들어 갔다면 그것은 거짓 증언입니다.

대체로 거짓 증언은 다른 사람을 해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숱한 공안사건이 그랬습니다. 무심코 하는 거짓 증언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재미 삼아 무심코 던지는 돌에 개구리들은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위험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심코 던지는 말이 상대방을 죽게 하거나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 증언이나 모함은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살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짓 증언이라고 하는 의도된 거짓일 수도 있지만, 외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무심코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거짓증거로 이웃을 해하지 말라’라는 제9 계명이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심코 행한 말들이 이웃을 상하게 할 때 그것은 거짓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9 계명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의 말들이 거짓 증언이 되어 이웃들을 상하게 하고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불신으로 몰고 가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의도적이던 그렇지 않던 거짓 증언을 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늘 통제해야 할 것입니다. 제9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 ‘꼭 전해야 할 말과 전해서는 안 되는 말“을 분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의도되지 않은 거짓 증언 하나를 통해서도 이웃을 상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고 언행을 조심하는 인격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조심스러운 삶의 태도를 말하면서 지혜자는 “이웃집이라 하여 너무 자주 드나들지 말아라. 그가 싫증이 나서 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잠언 25:17)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거짓말로 이웃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사람은 망치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다.”(잠언 25:18)

거짓 증언이 난무하는 사회는 서로를 불신하게 됩니다. 독재 정권 당시에 공안재판이 거짓증언과 증거에 의해서 조작되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의식 있는 사람은 누구도 공안재판의 결과를 믿지 않았습니다. 조작된 재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지로 국가전복을 노렸던 사람이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 받았을 지라도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양치는 소년’의 경우가 되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거짓은 우리 모두로 서로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듭니다. 거짓증거는 서로서로를 향하여 망치와 칼, 그리고 뾰족한 화살이 되어 서로를 찌르며 살도록 해 줍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서로를 향하여 찌르는 뾰족한 인생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제9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제 나의 언행을 통하여 이웃을 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뾰족한 화살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접착제처럼 서로서로를 화목하게 하고 통합하게 하는 데 힘을 씁니다. 통합과 화해의 일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거짓증거를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의 제9 계명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정신과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떳떳한 삶’입니다. 힘들고 고난의 길이지만 초지일관 진리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는 정정당당한 참 자유인의 삶입니다. 거짓으로 일 순간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일 순간의 번영은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총리 혹은 장관 국회 청문회를 보면 암담소위 우리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 중에서 이런 저런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면서 나라의 장래가 의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의 지도자 치고 제대로 군대 갔다 온 사람 몇 안 되고 자녀들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군대 면제 받고 부동산 투기 의심 사고, 등등.  고위직에 나서는 이들 가운데서 과연 누가 그동안 어렵지만 정정당당한 삶을 살아왔습니까? 그들 가운데 거짓에 의지하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하지 말라‘라는 제9 계명은 오늘 우리에게 정정당당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얄팍한 약은 수에 매달리지 말고 어렵더라도 올바른 길을 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거짓이 아니라 진리를 의지하는 정정당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거짓으로 만연되어 있는 우리의 역사, 거짓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잘못된 이 사회를 향하여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가치관이 거짓이 아닌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홍인식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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