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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해방신학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기사승인 2021.11.26  16: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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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위기와 탄소 중립에 요청되는 생태신학 ⑵

▲ UN 소속 과학자들은 증가하는 온실 가스 배출을 기후 재앙과 연관지었다. ⓒYasin Akgul/AFP via Getty Images

기후위기, 정치 그리고 해방신학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 회칙에 쓴 것처럼, 세계는 이익을 위해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피조물을 환원하는 “기술 관료 체계”의 세계화를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체계에 대해, 그리고 이 체계가 점점 더 널리 퍼지는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세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1991년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로런스 서머스는 은행 내부 회람용 보고서에서 “환경오염 산업을 세계 최저개발 국가로 이전”할 것을 주장했고, “유독성 폐기물을 비용이 저렴한 국가에 폐기하는 것에 대한 경제 논리는 나무랄 데가 없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머스 보고서는 인간이 경제적 환경적 비용과 재화 분배를 통해 사회적 지형만이 아니라 생태학적 지형도 변형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보고서는 최근 몇 세기 동안 세계가 인간은 당시 세계의 생태학적 사회적 상황을 전 지구 차원에서 중대한 방식으로 구성해 온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는 오염물질을 거래하는 것이 저개발 국가에게 경제적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가정 하에 세계의 쓰레기 수출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 보고서의 정책은 세계 최저개발 국가들을 (아니면 적어도 이들 국가 안의 해당 구역들을) 환경 “희생 지역” – 생태학적 경제적 건강 모두가 영원 히 손상되는 구역 – 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제모델이 형성하는 삶의 방식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현재 세계의 역사적 실체를 특징짓는 생태계 오염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위기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질적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의 위기

인간 사회에서는 급가속 시기 동안 경제적 부와 불평등도 함께 급가속되었다. 대략 20세기의 하 반기 동안 세계총생산(GWP)은 약 9.2조 달러에서 63조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경제적 부의 이러한 폭발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에 유엔 사회개발연구소(UNRISD)는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의 수가 12억을 넘는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니 같은 기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과 가장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 수준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

그것은 “가난해지는 경우가 증가했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가난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장의 유익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놀라우리만치 크게 증가했다.” 유엔 개발 계획(UNDP)은 2000년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 성장이 아 무리 빨라도 부유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소득이 쏠리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소득은 물방울 떨어지듯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그저 상류층 사이에서 순환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질적 가난의 위기에 대해 걱정해야 할 이유가 있고 UNDP 보고서에 나타난 우려를 공유해야 할 이유가 있다. 10억 이상이 여전히 극심한 가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급박한 관심과 행동을 계속해서 요구한다. 이렇게 명백한 부분 말고도 경제적 불균형은 계속해서 현재 세계의 상황에서 치명적이고 복잡한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계 불평등의 전반적인 감소를 향하는 현재의 추세가 초부유층의 증가라는 상쇄하는 추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옥스팜(Oxfam)의 최근 연구는 세계 8대 부자들(모두 남자다)이 통제하는 부의 규모가 전세계 하위 50%의 부의 규모와 맞먹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 간의 평균 소득 격차는 줄고 있지만 세계 “상위 1%”가 통제하는 부와 나머지의 격차는 계속 크게 증가하고 있다. 초부유층의 문제 외에도, 생태학적 위기가 완전한 재앙으로까지 악화되지 않고 세계 경제 성장률이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있다. 성장률이 유지될 수 없다면 세계 경제의 불평등 수준이 계속 감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치, 타당성, 그리고 신학의 과제

세계의 사회 경제적, 생태적 형태와 그 안에 내포된 위기는 정치의 개입과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사회 경제적 위기와 생태적 위기가 마치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를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분리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 삶의 영역(사회, 역사, 문화 등)을 개념상 구분하는 근대 세계관에 퍼져 있는 오류를 확장하는 것이다. 인간 문화가 출현한 이후 자연이 온전히 문화 밖에서 존재한 적은 없었다. 문화 또한 온전히 자연과 동떨어져 존재 한 적이 없었다. 인간의 사회적 상상은 늘 자연과 문화를 적절히 배합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연과 사회 사이의 물질 간 관련성을 생각하며 이렇게 썼다. “모든 생태 프로젝트는(그리고 주장들은) 일제히 정치 경제적 프로젝트이고(그리고 주장들이고) 역으로도 마찬 가지다.” 그렇다면 물질적 가난과 불균형의 사회적 위기는 생태 오염의 다차원적 위기와 복잡하고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제임스 콘은 환경 민족주의에 관한 글에서 사회적 영역과 생태적 영역이 서로 관련된 성격이라는 것을 말한다. 두 영역을 분리하려는 경향을 비난하면서 콘은 이렇게 썼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어떤 형태로든 생명을 위한 투쟁과 분리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통합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콘의 정서를 반영하여 생태 영역과 사회경제적 영역 사이의 관련성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환경적 위기 하나, 사회적 위기 하나 이렇게 분리된 두 가지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이면서 환경적인 복합적인 한 가지 위기 이다”(『찬미받으소서』, 139). 우리의 오늘날 상황에 필요한 정치는 그 비전속에서 생태 위기와 사회경제적 위기를 통합하여 이러한 복합적인 지구 위기에 대응할 포괄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전세계의 생태-사회적 위기가 근본적으로 정치의 위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성(legitimacy) 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세상을 신뢰할 만하게 구성하는 것이라면 생태-사회적 위기는 우리의 정치를 호출하여 질문한다. 대규모 생태 오염과 경제적 불균형이라는 현실은 우리의 정치적 구조와 신념의 타당성(adequacy) 및 이들 구조와 신념이 세상을 형성해 온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현재의 세계화 프로젝트를 야기한 전 세계 권력 네트워크는 복합적인 생태- 사회적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가? 이들은 “지속가능한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가?

신학과 생태 해방 신학의 필요성

기본적으로 신학은 “신에 대한 말”, 또는 “신-담론(God-talk)” 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세상에 드러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기초로 한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어떤 유형이든 확신을 가지고 정확히 말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적인 자기개방 덕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이 오만함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학은 그 담론이 언제나 미완성이며 단편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는 궁극적으로 이해불가능하며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정통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에 대한 언어에 있어 기본 신조이다.

신학적 담론 안에서의 한계라는 문제는 하나님의 무한성뿐만 아니라 담론 자체의 정황적 성격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자기개방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언제나 특정 시간과 공간에 자리한 언어이고 특정 사람으로부터 오는 언어이다. 이는 또한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언어라기보다는 그 정황과 사람의 특이성이 특징인 언어이다.

따라서 신학은 드러난 하나님의 신비를 주어진 정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고 그 정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신학의 핵심 과제는 하나님의 자기개방을 세상에(아니면 적어도 세상의 특정 정황에)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말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세상과 관련하여 무엇을 원하시는지 의미 있게 말해야 한다.

오늘날 인류는 생태 오염과 물질적 가난이 복합적으로 상호 연관된 현실을 특징으로 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몇 가지 신학적 질문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생태-사회적 위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인류세의 복합적인 위기 앞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개방인 계시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날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 책임 있게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부름을 받았는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향의 질문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세상을 집어삼키는 전 지구적 위기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한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기개방에 대한 우리의 자료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며 특히 세계화 프로젝트가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며 계속해서 “시대의 징조를 읽을”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함께 수행하는 중에 우리는 은혜와 죄의 동력이 오늘날 세상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언제나 부분적이긴 하지만) 좀 더 명확히 명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생태 해방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학의 새로운 전개 방식이다. “생태 해방신학”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고백함에 있어 땅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모두를 위한 우선권에 기반 한 담론의 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신학은 세상 속에서 이들 우선권을 드러내는 실천의 형태를 설명하고 격려하기 위해 애쓴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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