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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신학

기사승인 2021.11.13  15: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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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통주의의 성서이해: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⑵

▲ 로마서 강해 원고의 자필본이 놓여 있는 자펜빌의 옛 교구에 있는 칼 바르트의 책상 ⓒWikipedia

바르트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킨 신학자였다. 따라서 바르트의 전체 신학을 하나의 체계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초기 『로마서 강해』의 바르트는 하나님의 ‘타자성’을 강조하였고, 성숙한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했다. 『교회교의학』 제2권 신론에서 “모든 자연신학은 교회 내에서 논쟁의 여지없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바르트가 제4권 화해론에서는 “창조세계의 빛들”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논의한다. 바르트의 신학의 발전과정에 나타나는 이러한 전환에 대해 많은 동시대인들은 거듭 “새 바르트”라고 말하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가 과거에 자신이 주장한 이론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행동하시고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어떤 고정된 체계나 학파를 세우는데 관심을 갖는 소위 정통주의적 사고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신학은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Viatorum),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도중에 있는 신학이다. 바르트는 1961/1962년 겨울학기에 40년에 걸치는 그의 긴 교수경력을 끝마치며 행한 강의에서 신학 작업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다.

신학 작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른 모든 학문 활동이나 다른 작업과 구별된다. 곧, 이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미 해결된 물음, 이미 도달된 결과, 이미 도출된 결론에 근거한 완벽한 확신 위에 서 있으면서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자는 어제 자기 자신이 세워 놓은 터 위에 건물을 세울 수 없으며, 어제 축적된 자본에서 나오는 이자로 살아갈 수 없다. 그는 매일 매순간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1)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시작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자들은 과거에 이룩해놓은 업적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이곳에서 행동하시며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신학적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끊임없이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신학자들의 과제는 모든 설교자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지금 이곳에서 행동하시며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회중에게 설교해야 하는 과제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가 처음 목회에 뛰어들었을 때는 그에게 너무 낯선 생각이었다. 그 당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철저한 신봉자였고, 자유주의의 정신과 가치를 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바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이 시기까지의 바르트의 강연과 설교는 자유주의 정신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자연의 부활현상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5년 이후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 이상 자연의 부활과 관련이 없는 ‘새로운 창조’로 이해된다.(2)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과 급진적인 결별을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중 두 가지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그가 목회자로서 봉직하는 사이에 일어났던 세계적 사건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성서연구의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는 인간의 타고난 선함과 정신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를 가르쳤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심각한 검토와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바르트는 그가 존경하던 스승들이 독일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것을 보면서, 만약 전쟁의 이데올로기와 그들의 신학이 그렇게 순식간에 타협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선생들의 행위에 환멸을 느낀 바르트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학,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이해를 따를 수 없다”(3)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볼 때, 19세기의 신학은 미래가 없었다. 그는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그는 성서를 다시 철저하게 읽고 해석하며, “신학의 ABC를 새롭게” 배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성서가 ‘현대신학’에서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하기 시작했고(4) 마침내 그는 “성서 안에 있는 신기하고 새로운 세계”(5), 즉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주권적으로 그리고 활동적으로 현재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1916년부터는 로마서에 대한 주석을 쓰는 작업에 착수했고 1919년 책이 출판되자 예상치 못했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특히 우호적인 평가들을 고려하여, 다시 “돌 하나도 처음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개작하고 1922년에 제2판을 내놓았다. 바로 이 1922년판 『로마서 강해』가 바르트를 바르트 되게 했고, 20세기 신학사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가톨릭 신학자 칼 아담은 이 작품의 영향력에 대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과도 같았다”(6)고 했다. 바르트의 초기 신학에 이른바 ‘위기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이란 명칭을 부여해 주었던 것은 바로 이 새로운 강해서였다.

바르트의 새로운 발견은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다”로 표현된다. “이 하나님과 이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내게는 성서의 주제요 철학의 본질이다.”(7) 바르트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분명히 하기 위하여 ‘변증법’을 사용했다. 이 변증법은 “영원과 시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한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인데, 그는 이것을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다”는 성서적 증언(전 5:2)의 철학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거대한 심연을 강조하는 이 변증법적 방법을 그의 성서해석의 ‘체계’ 혹은 ‘원리’로 삼고, 19세기 신학과 그 성서해석에 반대하여 성서의 주제는 인간의 종교, 종교적 윤리 또한 인간의 은밀한 신성이 아니라 자연적인 세계는 물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대립해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독자성과 유일성이며, 인간과 관계하는 가운데서도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유일한 존재, 능력과 주도권이라고 강력하게 천명했다.(8)

바르트는 이 변증법적 신학을 통하여 19세기 신학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아래서 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가는 길을 택했다. 하나님은 신학의 주어인 동시에 술어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혼동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은 19세기 신학에 반대하여 바르트가 만들어냈던 거대한 간격과 심연은 후에 그 자신이 스스로 비판했던 대로 “약간은 냉혹했고, 비인간적이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교적인”(미주 9)것이었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와 같은 철저한 변증법적인 분리(diastasis)의 형식을 통하여 기독교 신학에서 신비주의나 도덕, 경건주의, 낭만주의나 관념주의의 느낌을 주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완전히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신학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미주

(미주 1) K. Barth, 이형기 옮김, 『복음주의 신학입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165.
(미주 2)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서울: 이레서원, 2007), 56.
(미주 3) K. Barth, “19세기 개신교신학”, 최영 옮김, 『말씀과 교회』39 (서울: 기장신학연구소, 2005), 193.
(미주 4)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Nach seinen Briefen und autobiographischen Texten (1975), tr. by J. Boden Karl Barth, His life from letters and autobiographical texts (London: SCM Press Ltd., 1976), 97.
(미주 5) 이것은 바르트가 1916년 가을, 그의 절친한 친구 E. 투르나이젠이 목회하던 교회에서 행한 강연의 제목이다. K. Barth, 바르트학회 공역,  『말씀과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7-26.
(미주 6) J. McConnachie, The Significance of Karl Barth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31), 43.
(미주 7) K. Barth, Der Römerbrief, tr. by E. Hoskins, The Epistle to the Romans(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2), 10.
(미주 8) E. Busch, Karl Barth, 119.
(미주 9) K. Barth, L'Humanité de Dieu(Genève: Labor et Fides, 1956), 15.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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