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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악마

기사승인 2021.11.02  16: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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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㊳

< 1 >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惡), ‘나쁠 악’자(字)는 ‘마음 심’(心) 자 위에 ‘추하다’ 또는 ‘버금가다’는 뜻의 아(亞)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등뼈가 튀어나온 두 곱사등이가 마주 선 옆모양을 본뜬 글자가 ‘아’(亞)자라는데요, 그러므로 ‘악’(惡)은 보기 싫은 것과 버금가는 것이 마음에 자리하여, 그것이 드러나는 나쁜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악’ 무엇인가?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질문은 단지 심리적,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매우 사변적이고 복잡한 종교적 문제입니다. 도대체 ‘악’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하는 질문은 이른바 ‘신정론’ 안에서 제기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시며 절대 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악’을 두셨을까? 인간을 시험하려고? 아니면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지요.

악의 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성경은 창세기입니다.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이야기이지요. 그리스도교는 ‘악’을 종교적 언어인 ‘죄’로 지칭하는데요,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순종을, 이웃 인간과의 관계에서 폭력(가인의 아벨 살해)을 성경이 증언하는 최초의 악, 원죄라고 이해합니다.

‘원죄’는 최초의 죄라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보편적 죄,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해 필멸성과 부패된 본성을 타고 나며 신의 은총이 없이는 스스로 믿음을 시작하거나 선을 실천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악의 문제를 깊이 사색하고, 그 후 악에 대한 서구 사상의 골격을 세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나 악을 하나의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악을 실체로 이해한다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하나님의 절대성이 침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악이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사변적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했고,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행동, 의지, 결정의 자유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윤리적 문제로 판단한 것입니다.(1)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악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자유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화나 종교는 악을 인격화하여 ‘사탄’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성경에 ‘사탄’이라는 단어는 모두 49번 등장하는데, 구약보다는 신약성경에서 더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14번 등장하는 사탄이라는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로 ‘적대자’, ‘원수’, ‘음해자’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였습니다. 사탄이 고유명사로 처음,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한 곳은 욥기입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은 천사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인데,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살펴보고, 사람에게 고통과 고난을 주면서 시험하는 존재’입니다(욥 1,6-7; 2,17). 사탄이 천사들과 함께 있다는 욥기의 표상도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오래된 이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사탄이라는 단어가 모두 35번 등장하는데, 2번은 인간에 대하여 사용되고, 나머지는 ‘귀신’, ‘바알세불’, ‘벨리아르’, ‘뱀’, ‘붉은 용’ 등으로 형상화되어, ‘원수’, ‘속이는 자’, ‘악한 자’, ‘거짓말쟁이’, ‘적대자’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인간 자신을 사탄으로 지칭한 경우는 메시아의 고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에게 항의한 베드로에게 하신 것과(막 8,33),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눅 22,3)는 말씀에서 등장합니다. 그 외의 경우 사탄은 사람을 미혹하고, 병을 주고, 빛의 천사,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존재(고후 11,14-15),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납니다(살후 2,9). 심지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등장한 사탄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마 4,8-9).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이슬람은 사탄을 인간보다는 더 높은 존재인 천사들 가운데 타락한 천사로 생각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이나 악마를 인간 밖에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세력으로 보면, 자칫 악의 원인을  타락한 인간의 의지 혹은 타락한 천사인 사탄이 소유한 나쁜 의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2)

사람들이 악의 근원을 외부의 사탄이나 악마에게서 찾는 것은 흔히 불의하게 행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어떤 수동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이 악한 것이 아니라, 악마가 그 사람을 불의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고 믿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때 추종했던 마니교도들이 한 것입니다. 마니교는 영원한 어둠의 왕국이 인간이 악을 행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영혼은 인간의 악한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3)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원인은 오직 인간의 의지에 놓여 있다고 강력하게 마니교를 반박했습니다.(4) 인간의 악한 행동의 원인과 책임을 악마에게 전가하는 이런 수동성은 인간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희생자로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악마에게 전가시켜서 오히려 자신을 악마적 힘의 희생자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과 희생자 사이에 놓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악을 행한 사람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5)

이것이 참으로 악의 모호성이지요. 악과 악한 사람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를 전율(戰慄)하게 합니다.

▲ 낙원으로부터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 ⓒGetty Image

< 2 >
악의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것은 ‘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가?’,
‘왜, 악한 사람이 더 잘 사는가?’ 하는 질문 때문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의 욥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람들은 지혜전통에 기대어 혹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이 같은 질문에 이런 저런 답변을 합니다. ‘인과응보’라고. 재난과 고난은 지은 죄의 결과이고 그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또 다른 사람은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라고 주장합니다(욥 36, 15). 신은 인간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신다는 것이지요(욥 33,19).

물론 자업자득이라고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로 고통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난에는 이런 대답이 정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롭고 선한 사람의 고난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또 착한 사람의 고난에는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기 때문에 그저 고난을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잔혹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만일 고난이 사려 깊은 인격과 든든한 믿음을 만들기 위한 시험이라면, 하나님은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험에서 실패하고 마는지를 살피셔야 합니다.

이런 저런 대답이 호응을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내세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상살이의 불공평함을 견뎌내게 해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불의를 외면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핑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성과 용기로 그 불의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 구실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6)

그런데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욥은 전적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과 다툽니다. 욥은 자기에게 복을 내려주신 분도, 자기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기에게 영광을 주시고 면류관을 씌어주신 분도, 자기를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자기가 가는 길에 빛을 비추신 분도, 가는 길을 어둠으로 가로막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합니다(욥 19,6-9). 욥은 절규하면서 부르짖었고,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마침내 욥은 모든 잘못이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합니다(욥 32,2). 선한 이들이 고난을 받는 것도, 악한 이들이 더 잘되는 것도, 그 책임은 모두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그런 분이실까요?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병이나 사고나 자연재해를 두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운이 없어서 일어나고, 어떤 것은 우리 주변의 나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며, 어떤 것은 우리가 인간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스런 일들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벌도 아니요, 하나님의 어떤 원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닙니다.

삶의 비통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것을 높은 하늘에서 단지 바라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극을 당했다하여 하나님에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사탄에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에게 돌아가 삶의 모호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분명히 우리만큼 노여워하시기 때문입니다.(7)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실에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왜 이런 나쁜 일이 내게 벌어지는가? 사탄의 장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시험인가?’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이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미주

(미주 1) 폴 리꾀르, 악(惡), 철학과 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 박영범 역, 성광문화사, 2015, 46.
(미주 2) 폴 리꾀르, 악(惡), 철학과 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 박영범 역, 성광문화사, 2015, 46.
(미주 3) 폴 리꾀르, 악(惡), 철학과 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 박영범 역, 성광문화사, 2015, 46.
(미주 4) 폴 리꾀르, 악(惡), 철학과 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 박영범 역, 성광문화사, 2015, 46.
(미주 5) 폴 리꾀르, 악(惡), 철학과 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 박영범 역, 성광문화사, 2015, 29.
(미주 6) 헤럴드 쿠쉬너,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김하범 역, 45.
(미주 7) 헤럴드 쿠쉬너,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김하범 역, 194.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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